그동안의 일을 찬찬히 헤아려 본다.
외로움은 무엇인지 그리움은 무엇인지
슬픔이 아름다운 까닭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다음 주 월요일 해군 수송병으로 입대한다.
멋진 군인이 되어 맑은 빗방울처럼 돌아오는 것이다.
그동안의 일을 찬찬히 헤아려 본다.
외로움은 무엇인지 그리움은 무엇인지
슬픔이 아름다운 까닭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다음 주 월요일 해군 수송병으로 입대한다.
멋진 군인이 되어 맑은 빗방울처럼 돌아오는 것이다.
하늘이
맑게 우는 날
; ; ; ; ; ;
나무가 좋아
사시사철 푸른 마음
소 나무가 좋아
꿈결에 젖은
소 나무
恨 씻는
나무
말간
나무
산에 사는 작은 새는
슬픈 소나무가 좋아
하늘이 좋아 우네
어젯밤
아이를 묻었다.
다시 일어나
다시
못내 울다가
[2024 04 06 퇴고 과정
1.
어젯밤
한 아이를 죽였다.
죄를 지었다.
다시 일어나
다시
못내 울다가
2.
어젯밤
한 아이를 묻었다.
죄를 지었다.
다시 일어나
다시
못내 울다가
3.
어젯밤
아이를 묻었다.
다시 일어나
다시
못내 울다가]
해님은 달님 쫓아
달님은 해님 쫓아
저 멀리 달아나네
저 멀리 달아나네
해님은 달님 쫓아
달님은 해님 쫓아
1/7(일):
매일 못해도 한 줄씩은 일기를 쓰기로 했다.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여전히 글 쓰는 게 즐겁다. 하지만 모든 일을 다 적을 필요는 없다.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음을 명심하자.
어머니께서 점심을 차려 놓고 약속을 나가셨다. 뒷설거지는 내가 했다.
오늘 저녁은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오돌뼈는 토토에게 주었다.
삼겹살과 마늘, 고추장, 쌈무, 참기름; 이 조합은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당신이) 말은 모질게 해도 항상 네가 잘 되기를 바란다'고 하셨다. 나는 나지막이 ‘알고 있다’ 답했다. 그는 더해서 ‘네 편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고 하셨다.
토토 산책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앞집 이웃을 마주쳤다.
곧 군대를 갈 예정이라고 하니, 황송하게도 내게 용돈 5만원을 주셨다...
형과 함께 경복궁에 달리기를 하러 나갔다가(내가 제안했다.), 눈길이 미끄러워 조금 뛰다 다시 돌아왔다.
요즘은 군대를 갈 것을 준비하고 있다. 하나둘 정리해 나가고 있다.
1/8(월):
늦은 아침, 여자 생각을 하다 일어났다. 거실에서 빈둥거리다, 간단히 김치볶음밥을 먹고, 토토 산책을 갔다. 도중에 들개를 발견하곤 몰래 내뺐다. 간혹 이렇게 위험한 상황이 있다. 저녁엔 테니스 레슨을 받았다. 코트 바깥에 멧돼지가 지나가는 것을 봤다. 서울 한복판에도 멧돼지가 있다. 점심을 적게 먹은 탓인지, 몸에 힘이 없어 평소보다 일찍 집에 돌아왔다. 오는 길은 춥고 배고팠다. 여자 생각을 했다. 아아,
밤에는 유튜브를 봤다. 기관총으로 멧돼지를 학살하는 영상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아주 영악하고 잔인한 방식으로 생명을 학대할 수 있다. 살생에 일절 거리낌이 없으니, 인간이 인간을 대함도 마찬가지다. 더해서 특수청소업체가 운영하는 채널을 보았다. 시체의 흔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나도 곧 저렇게 될 것만 같았다. 아무리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1/9(화):
눈이 많이 오는 날이다. 윤동주문학관으로 봉사를 갔다. 신경 써서 옷을 입었다. 검은색 코트에 초록색 목도리이다. 내가 맡은 일은 관람 안내이다. “안녕하세요. 자유 관람 해 주시면 됩니다. 제3전시실은 촬영 금지입니다.” 봉사 활동이 끝나고 청운동의 전주 식당에서 부모님과 저녁 식사를 했다.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물론 이제는 게임도 지겨워진 지 오래다. 가슴이 답답했다. 내리 음악을 들으며 글을 만졌다.
1/10(수):
오늘도 윤동주문학관엘 갔다. 청소 등 잡일을 돕고 어제처럼 관람 안내를 했다. 정형화된 업무는 익숙하고 편안할지 몰라도 더는 떨림이 없다. 그런 면에서 나는 확실히 공무원 체질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일이 없으면 일을 만들어서 한다. 사람이 없을 때 짬짬이 윤동주의 시를 읽었다. 그의 말은 아름다웠다. 섭섭하게도 내게는 그만한 재주가 없다. 문체는 타고난 것일까. 만들어진 것일까. 둘 다인 것일까.
집에서 저녁을 먹고, 숨을 고르고, 토토 산책을 갔다. 하늘은 깜깜하고 공기는 텁텁하고 왜인지 오늘따라 쎄한 기분에 짧게 돌다 집에 돌아왔다. 토토도 더 걷자고 뻐팅기는 일 없이 나를 잘 따라와 주었다.
1/11(목):
백주 대낮에도 토토는 방구석에 길게 늘어져 있다. 산책 가자는 한 마디에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 토토 산책을 하고, 봉사 활동을 하고, 테니스를 쳤다. 아차, 또 라켓 줄을 끊어 먹었다. 코치님께서, 내가 나이도 어린데 여우같이 친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런 건 나중에 해도 된다고 하셨다. 레슨이 끝나고 게임을 했다. 아직도 나는 에러가 많다. 코치님께서 과자를 주셨다. 정 많은 사람. 집 오는 길에 또 여자 생각을 했다. 단지 여자. 섹스. 보다는. 함께함을 생각했다. 오래된 일이지만. 여전히 그때의 떨림을 잊지 못한다.
집에 들어오고 보니 9시가 넘었다. 잠시 목을 축이고, 어머니와 함께 토토 귀 소독을 했다. 짠 게 땡겨서 컵라면을 먹었다. 얼마 전 일본에서 공수해 온 유부 우동 라면이다. 국물까지 싹싹 털어 먹었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글을 쓴다.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이끌려, 인생을 갈아 넣고 있다.
1/12(금):
윤동주문학관에서 봉사 활동을 했다. 늘 하던 사람이 하니까 편하다고 하셨다. 내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구나 싶어 흐뭇했다. 일은 재미없어도 함께함은 재미있다. 이후 토토 산책을 하고, 미뤄 둔 운동을 하고, 형의 머리 아픈 이야기를 들었다.
1/13(토):
오늘은 엄마가 골라 준 옷을 입어 보았다___주말 윤동주문학관.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09:30~13:30 동안에만 관람객이 200명 넘게 왔다.(평일에는 하루종일 120명 정도가 온다.) 그렇지만 잘 감당해 내었다. 담당자가 한두 시간 자리를 비운 사이 윤동주 시집 두 권을 팔았다. 오늘 하루 내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 쉴 틈 없이 일했지만, 사람들이 좋아해 주니 좋았다! 관람객에게 사탕 두 개를 받았다. 하나는 담당자에게 드리고 나머지 하나는 내가 가졌다.
어제 늦게까지 글을 쓰느라 잠이 부족했다. 노래를 부르고, 피아노를 치고, 가족들과 이야기하고, 토토 산책을 하고, 이외 잡다한 것을 하며 쉬었다. 철학도 문학도 음악도 모두 갈 길이 먼데, 너무 허송세월하고 있는 건 아닌지 현타가 온다. 늘 가슴속에 맴도는 이름이 있다... 그들은 나를 믿어 주었다. 그 길로 나는 꿈을 꾸었다. 모든 것을 배로 갚아야 한다. 내 모든 것을 내던져야 한다.
1/14(일):
아침. 윤동주문학관. 오늘 담당자는 처음 뵙는 분이다. 평소처럼 내 소임을 다했다. 낮 동안 진눈깨비가 추적추적 내리었다. 내가 있을 동안 약 109명의 관람객이 왔다.
저녁 식사 시간. 형이 나를 무시하며 함부로 내뱉는 말에 감정이 몹시 상했지만 꾹 참았다. 어머니는 바로 옆에 있으면서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서운했다. 응원이나 인정은 기대하지도 않는다. 최소한 나의 발목을 붙잡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따라 유난히 몸과 마음이 지친다. 젖은 산책길이 미끄러운 것을 구실로 산책을 하루 쉬려다가, 토토를 생각해 10시쯤 뒤늦게나마 산책을 갔다. 고즈넉한 밤길이다. 아무나 조금이라도 내 말을 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지인 몇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런 용건도 없이. 중학교 동창 한 명이 내 전화를 바로 받아 주었다. 마음 가는 대로 이것저것 말을 꺼내었다. 가는 길이 외롭지 않아 기뻤다. 많이 걷고 대화하니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토토가 산책을 다녀오고 차분해졌다. 추운 마당에 가만 서 있는 토토를 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토토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는 내 가족이기 때문이다. 나는 곧 샤워를 했다.
이후 새벽 3시까지 계속해서 글을 썼다. 매우 피로하지만 어쩔 수 없다.
1/15(월):
오후 1시 집 근처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았다. 17000원이 저렴한 가격은 아니지만, 늘 익숙하고 편한 곳을 찾게 된다. 미용실 가는 길에 차 사고가 난 것을 보았다. 버스 뒤쪽을 승용차가 세게 박은 듯했다. 큰 사고가 날 만한 곳은 아닌데 의외다. 남 일이라 그런지 슬프다거나 하는 감정은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은 봉사 활동이 없다. 코트가 얼어 테니스도 치지 못한다. 설거지와 토토 산책. 그 외에는 딱히 하는 일 없이 어영부영 하루를 보냈다. 우리 집에 나의 방은 없다. 다만 좁은 창고에 내 컴퓨터를 두고 쓰고 있다. 그곳은 방음은 커녕, 난방조차 안 된다. 암만 옷을 껴입어도 손이 시려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온전한 나만의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 이쁜 여자친구가 생기면 좋겠다. 내가 원하는 것을 원 없이 누릴 수 있기를 원한다.
1/16(화):
악몽을 꾸다 일어났다. 테니스 코트에서 어떤 사람한테 따귀를 맞고, 화가 난 나도 그 사람을 때린 꿈이다. 개꿈도 참말루... 나는 인간 관계가 무너졌을 때가 가장 힘들다. 나의 전부는 사람이다. 시험을 망치거나 돈을 잃거나 하는 일은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침으로 샌드위치를 먹고, 허겁지겁 윤동주문학관에 갔다. 도착하자마자 대걸레질을 했다. 담당자가 이쁘시기 때문에 조금 더 열심히 하는 것도 없잖아 있다.(...) 낮에 중국인 세 분이 오셨다. 시집(10000원 비과세) 하나, DVD(15000원) 하나, 엽서 세트(5000원) 하나, 엽서 낱장(장당 1500원) 넷을 사 가셨다. 부족한 영어였지만 열심히 설명하고 소통했다. 담당자께서 점심을 드시러 가서 내가 대신 기념품 판매를 맡아야 했다.
얼마 전부터 오규원의 '현대시작법'이라는 책을 깨작깨작 읽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읽으려고 벼르던 시 창작 이론서이다. 윤동주의 시를 접하고, 다시금 시에 대한 열정이 샘솟았다. 나도 그처럼 여운이 맴도는 좋은 글을 쓰고 싶다.
봉사가 끝나고 새마을금고 ATM에 들러 가지고 있던 현금 17만원을 카카오뱅크 계좌에 입금했다. 수수료 1천 원은 면제이다. 입금한 돈은 바로 대신증권 계좌로 옮겨 ETF를 매수하는 데 썼다. 요새는 미국과 인도 두 곳 인덱스 펀드에 투자하고 있다. 꽤 괜찮은 수익이 나고 있다. 계속 보유할 생각이다.
형이 테라리아라는 게임을 하는 것을 구경했다. 나도 오랜만에 그 게임이 하고 싶었지만, 방도 춥고 해야 할 일도 많아 포기했다. 게임 말고도 재밌는 것이 많다.
1/17(수):
마쓰오 바쇼의 시를 읽었다. “자세히 보니, 냉이꽃 피어 있다. 울타리 옆에!” 짧지만 여운이 남는 시이다. 앞으로 다른 나라의 시도 종종 읽어 봐야겠다.
저녁으로 치킨을 먹었다. 하도 치킨을 자주 먹으니 더는 기쁨이 없다. 어머니께 치킨을 가끔씩만 먹자고 말씀드렸다.
후식으로 부드러운 흑임자 인절미 한 조각을 먹으려는데, 씹는 순간 왼쪽 어금니가 엄청 아파 깜짝 놀랐다. 몇 분 동안 심한 통증이 지속되었다. 몇 개월 전에도 같은 증상으로 치과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인다는 소견을 들었다. 치아 크라운 표면만 조금 조정해 주셨고 그 후 한동안 큰 문제는 없길래 안심하고 있었다... 조금만 찬 것에도 이가 시리고(심지어 양치할 때 수돗물조차!), 씹을 때도 너무 아프고, 이 치아는 오래전부터 아주 말썽이다. 한쪽으로만 씹는 것은 매우 불편하다. 내일 아침에 곧장 치과를 가야겠다.
몸이 아파지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처량하다. 운동도 못하고 토토 산책도 못했다.
졸리다. 우선 푹 자기로 했다. 네가 보고 싶다.
1/18(목):
이른 시간에 일어났다. 녹차를 마시며 글을 썼다. 엄마도 일어났다. 아침을 먹었다. 토토와 걸었다. 눈 묵은 길이 찰박찰박 질퍽였다. 오전 9시경 토토와 윤동주문학관 앞을 지나가던 중 출근하는 담당자를 마주쳤다. 인사했다. 이따 보자고 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씻고 치과에 갔다. 치과 의사께선 나의 증상을 매우 어려워 하셨다. 어떨 땐 아프고 어떨 땐 괜찮다니... 일단 이가 시리지 않도록 불소를 도포해 주셨다. 발치하지 않고 더 지켜보기로 했다.
봉사 시작까지 시간이 남아 윤동주문학관 근처의 청운문학도서관에 갔다. 위에는 고풍스러운 한옥이 세워져 있고, 아래에는 아담한 도서관이 있다. 깔끔하니 괜찮았다. 여기서 마침 중고등학교 동창도 마주쳤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반가웠다.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윤동주문학관에 갔다. 전국의 문학관을 순회한다는 관람객도 있었다. 여기가 첫 번째라고 하셨다. 참 낭만적인 일이다. 담당자께서 메론빵 등 간식을 주셨다. 치과 때문에 점심을 못 먹었었는데, 덕분에 힘이 났다. 담당자는 내일 출장을 갈 것이라고 한다. 3시간 정도는 나 혼자 입구를 지키고 기념품을 팔아야 한다. 나라면 믿고 맡길 수 있나 보다.
집에서 아버지, 형, 나 셋이서 스타크래프트를 했다. 나와 형은 스타크래프트를 거의 하지 않지만, 아버지는 오랫동안 하셨다. <나와 형과 인공지능 몇 마리 vs 아버지> 결과는...? 나와 형이 이겼다. 아무래도 밸런스가 맞지 않았나 보다.
1/19(금):
아침은 샐러드, 두유___4살 연상의 여자 선배에게 코스피가 만성적인 저평가에 시달리는 이유에 관해 카톡을 보냈다가 데었다. 아마도 내가 정치 얘기(부자 증세가 가진 문제점에 대해...)를 꺼냈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런 주제에 관심이 없다고 했다. 사람들은 늘 이런 식이다. 머리가 아팠다.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토토 산책을 했다. 바삐 몸을 움직이니 그나마 정신이 맑아졌다. 집에 와서 씻었다. 허겁지겁 카레밥을 먹고, 윤동주문학관으로 갔다. 하늘에는 구름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고, 강한 바람이 분다. 공기가 좋으니 전망도 좋다. 서울의 빛나는 빌딩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마디로, 이곳에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있다.
출장 갔던 담당자가 돌아오셨다. 시집을 하나 팔았다고 말씀드렸다. 얼마 뒤 집에 갈 채비를 했다. 정리하고... 인사하고... 한데 나의 안색이 안 좋아 보였나?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그렇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가슴이 답답했다. 팔굽혀펴기와 턱걸이를 했다. 운동이 가장 쉬운 것이라고 한다. 참 맞는 말이다.
1/20(토):
엄마와 토토가 윤동주문학관 앞을 지나갔다. 반가워서 인사했다.
좋은 분들도 많지만, 여러 사람을 응대하다 보면 별의별 행태를 다 볼 수 있다. 인사를 씹는 것은 기본이요, 애써 도와준 일에 감사 인사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아무 데나 쓰레기를 버리고 가는 관람객도 있고, 아리가또 일본말로 인사하며 나가는 한국인도 있다.(일본어를 쓰는 것이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상황의 맥락을 파악해야 한다. 윤동주는 일제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인물 중 하나이다. 그런 인물을 기리는 공간에서 일본말을 쓰는 것이 조롱의 의도가 아니었다면 무엇이었을까?) 나도 여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인사에는 인사하고, 고마운 건 고맙다 말하고, 그런 것들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니 꼭 하자. 서운한 일을 자꾸만 겪다 보니 나도 점점 감정이 무뎌지고 진심을 잃게 된다. 놀이동산 따위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영혼 없는 알바생들이 왜 그렇게 된 건지 알 것만도 같았다.
해설사 선생님과 잡담을 했다. 예술가의 자세에 대해 가르침을 하나 주셨다. 작품을 감상할 때는 항상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것(본질)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연아 선수를 예시로, 김연아의 화려한 기술(결과)만을 바라보고 좇는 사람은 결코 김연아를 능가할 수 없다. 김연아가 추구하는 이상을 꿰뚫어 보는 사람만이 김연아를 뛰어넘을 수 있다. 내가 훌륭하다고 하셨다. 아니다.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픈 사람이지 훌륭한 사람은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담당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시집 1권과 스토리북 1권을 팔았다. 이제는 익숙하다. 문학관에 문의 전화가 와서 받았다. 화장실이 어디 있나요? 90m 옆에 공중 화장실이 있다고 말씀드렸다. 다들 나를 좋아해 준다. 일을 열심히 잘한다고. 센스가 있다고. 그래서 더 열심히 하게 된다.
밤에 형이 갈아 준 바나나 우유를 마셨다. 자기 것을 만드는 김에 내 것도 만들어 줬다.
가슴이 답답했다. 생각해보자. 돈이 많아진다고, 힘이 강해진다고, 명예를 드높인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 도대체,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모두 무슨 소용인가? (그리고 나는 그러한 순수한 사랑마저 마냥 선한 것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밤 11시 무렵, 아빠가 비틀비틀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셨다. 그는 대뜸 나를 발로 찼다. 나도 똑같이 발로 차 주었다. 엄마가 내게 화를 내셨다.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가 못 들어주겠다. 엄마가 운다. 모두 술 때문이다. 마음이 좋지 않다.
1/21(일):
오늘도 윤동주문학관에 다녀왔다. 어머니는 하루종일 낮잠을 잔다. 요새는 현대시작법을 읽고 있다.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좋은 책이다.
저녁으로 족발을 먹었다. 아버지는, ‘너는 모르겠지만, 너를 응원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셨다. 근데, 내 생각에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더 많다.
오늘따라 토토가 기분이 좋아 보인다. 토토는 산책도 하고, 맛있는 고구마도 먹고, 많이 놀았다. 토토가 웃으면 나도 웃음이 난다. 토토가 화를 내면 나도 화가 난다. 토토가 아파하면 나도 아파진다. 그는 내 가족이기 때문이다.
운동을 했다. 팔굽혀펴기와 턱걸이를 했다.
나의 1전공은 철학이다. 이번에 이중전공이 확정됐다: ‘영미문학•문화’이다. 가장 원하던 곳에 붙었으니 잘된 일이다.
1/22(월):
토토 산책을 했다. 테니스를 쳤다. 넘나 추운 날이다. 따듯한 컨테이너에서, 코치님께서 내 학교와 학과를 물어보셨다. 한국외대 철학과라고 했다. 철학이라는 단어에 사람들은 ”우오오오...“ 감탄했다. 코치님께서 농담조로, 졸업하면 철학관 차리는 거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말없이 썩소를 날렸다.
집에 가는 길, 흔들리는 버스에서, 그리운 얼굴을 떠올렸다. 슬펐다.
형과 테라리아를 했다. 하도 오랜만에 하니까 다 까먹었다. 전문가 모드의 Moon Lord를 잡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실패했다.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고서야 절대로 잡지 못할 것 같다.
친구와 Microsoft 365 Family를 같이 쓰기로 했다. 대학교에서 지원해주는 원드라이브 용량이 심각하게 줄었기 때문이다. 나는 드라이브의 편리함을 잊을 수 없다. Microsoft 365 Family는 여럿이서 비용을 분담한다는 전제 하에 매우 저렴하다.
1/23(화):
윤동주문학관. 날이 몹시 추워 하루종일 관람객이 27명뿐이 안 왔다. 여유로웠다. 오늘의 해설사. 엄청 말수가 많으시고, 자립적이고, 독특하신 할머니다. 나를 붙잡고 놓아주시질 않는다.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 ‘자식을 있는 그대로 두는 것. 신경쓰지 않는 것.’ 간섭하고, 통제하려 들면 도리어 일을 그르치게 된다. 나의 생각과 맞닿는 데가 있었다.
밤에 토토 산책을 했다. 그것은 따분한 토토의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 유일한 낙이기에, 춥더라도 게을리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내 가족이기 때문이다.
딸기를 먹었다. 상큼하다! 역시 사람은 과일을 먹어야 한다. 그리고 슬펐다. 너무 슬펐다. 영원히 혼자일 것이다. 모두에게 잊혀질 것이다.
숨쉬는 것조차 부끄러웠다. 말 한 마디 건네고 싶지만,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안다.
1/24(수):
윤동주문학관. 오늘도 열심히 했다. 해설사 선생님이 나는 어딜 가든 이쁨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 칭찬이 낯설었다.
1/25(목):
아침 햄버거. 토토 산책. 점심 사골 국물.
윤동주문학관에 갔다. 오늘이 봉사 활동 마지막 날이다. 상품 재고를 세었다. 이런 단순 노동은 하기 싫었지만 군말 없이 얼른 해치웠다.
해설사님과 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썼던 민망한 시들을 보여드렸다. 시인 문건서. 멋있다고. 이름도 예쁘다고 하셨다.
담당자님께선 내가 가는 게 아쉽다고 한다. 기념품 하나라도 챙겨 갔으면 좋겠다고, YES24 윤동주 문학 텀블러를 주셨다.(그리고 핸드크림. 예전에 손이 건조해 피가 나서, 핸드크림을 빌린 적이 있는데, 평소에도 좀 바르고 다니라고 그걸 그냥 주셨다.) 이런 경우가 잘 없는데, 오랫동안 꾸준히 잘해 주어서 주는 것이라고 한다.
”별똥 떨어진 데가 내가 갈 곳인가 보다.“
라는 문구가 적힌 검은 텀블러.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라는 문구가 적힌 흰 텀블러.
둘 중 하나를 고르라기에, 나는 잠시 고민 끝에 별똥 문구가 적힌 검은 텀블러를 골랐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텀블러가 아니라, 그 선물 안에 담긴 사람의 마음이다.
멋쩍게 인사를 드렸다. 저는 좋은 사람이 아닌데, 좋은 사람으로 여겨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리고 제가 하는 일이 궁금하시면 mogos.kr이라는 저의 웹사이트(워드프레스로 만든 나의 명함이다.)에 들어가 보시라고.
담당자께선 나보고 잘 가라고. 군대도 잘 다녀오라고.(공군을 가기 위해 시작한 봉사였다.) 종종 문학관도 오라고 하셨다.
테니스를 조금 쳤다. 집에 갔다. 토토가 나를 반겨준다. 어머니께 내가 칭찬받은 일을 자랑했다. 이런 하루는 외롭지 않다.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1/26(금):
테니스 레슨을 받았다. 피곤해서 집중이 되지 않는다.
마인크래프트 서버를 열고 싶다는 친구를 도와주었다. 디스코드로 실시간 화면 공유를 했다. 얘는 진짜 컴맹. 아무것도 모른다. 자바를 설치하고, 함께 서버를 여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포트포워딩에서 문제가 생긴 듯하다. 걔는 접속이 되지만 나는 접속이 안 된다. 내 공유기와 걔 공유기가 다르니까 방법이 다르다. 그래서 어려웠다. 시간이 늦어 다음에 마저 해결하기로 했다.
오늘 하루는 정말이지 보람되지 못했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한다. 작곡 공부도 해야 한다. 군대 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이렇게 허송세월해서는 안 된다.
1/27(토):
폐허가 된 경기상고를 탐방하는 꿈을 꾸었다. 유해를 찾을 수 있었고, 매우 무서웠다. (꿈에서) 사진을 여러 장 찍어 두었다. 열한 시간을 내리 잤다. 어제 많이 피곤했나 보다.
점심으로 스파게티를 먹었다.
어제 마인크래프트 서버를 만들겠다던 아이는 마침내 포트포워딩을 성공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함께 머리를 싸매며 고민한 내게는 고맙다는 일언반구조차 없지만(나보고 이제 필요없으니 꺼지라고, 무능하다고 했다.), 어쨌든 그러려니 이 아이가 잘 되었으니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1/28(일):
잠을 편히 이루지 못하였다. 이 문제로 또 형과 싸웠다. 지겨웠다. 일어나자마자 밥을 먹고 청운문학도서관에 갔다.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내 방은 너무도 좁고 춥다.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비염이 나를 힘들게 한다. 저녁 시간. 돌아오는 길. 고양이를 보았다. 지난 일을 회상했다. 나는 왜 진작 자살하지 못했는가. 두고 가는 것들에 미련이 남아서일지도, 무언가 한이 맺혀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토토 산책을 했다. 아무 생각 없이.
1/29(월):
김치볶음밥을 먹었다. 위에 계란후라이를 얹어 먹었다.
뜬 머리를 가라앉히기 위해 빗질을 했다. 오래 전부터 빗질만 해도 머리가 따끔따끔 아프다. 미용실 가는 일도 무섭다.
공군 군악병 면접을 보러 공군호텔에 갔다. 군복 입은 사내들이 부담스러웠다. 내 지원 분야는 성악 베이스이다. 그렇지만 나는 성악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요행을 바라고 한 번 찔러 본 것이다. 대기실에는 사람이 많았다. 색소폰, 통기타, 플룻 등... 여러 현란한 연주 소리가 들린다. 옷매무새도 다들 멋있다. 나는 위축되었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았다. 그저 뻘쭘하게 앉아 있었다. 내 차례는 거의 마지막(뒤에서 두 번째)에 있었다. 대기실에서 몇 시간(대략 오후 1시부터 3시까지)을 허비했다. 계속 코가 막혀 호흡이 불편했고, 화장실에 가고 싶었고, 집에 가고 싶었다.
이제야 올 것이 왔도다. 대기실 밖으로 나와 1층으로 내려갔다. 면접장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노랫소리를 들었다. 다들 나랑 성량이 차원이 다르다. ㅠㅠ
면접장(결혼식장을 면접장으로 쓰고 있더라)에 들어갔다. 면접관 여럿이 일렬로 앉아 있었다. 긴장됐다. 나는 성악 전공자가 아니라고, 그냥 경험 삼아 왔다고 말씀드렸다. 중학생 때 배웠던 ‘돌아오라 소렌토로’라는 노래를 불렀다. 끝까지 듣지도 않고 중간에 종을 치셨다. 이제 그만 불러도 된다고. 좋은 경험이 됐길 바란다고 하셨다. 애써 웃음을 참고 있는 듯했다. 불합격을 직감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이 피곤했다. 긴장할 일이 아닌데 긴장했고, 부끄러울 일이 아닌데 부끄러웠다. 다음 회차 공군 운전병 지원을 위해 군악병 지원은 접수 취소하기로 했다.
그리고 외로웠다. 나를 찾는 사람은 없다. 외모가 잘생긴 것도 아니고, 실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지체가 높은 것도 아니다. 싸우거나, 무시받거나, 꾸중을 들은 기억뿐이 없다. 그러한 상처들은 곪고 곪아 나를 옭아매는 족쇄가 됐다. 그러니까, 과거의 슬픔에 더욱 얽매이게 되고, 나 스스로 나의 한계를 섣불리 단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나를 벌레로 보았다. 그래서 나는 벌레가 되었다. 그것은 무의미한 껍데기이다.
차라리 혼자가 낫다. 혼자가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돈이 있으면 혼자 살아갈 수 있다. 늦은 새벽 모니터 불빛에, 시끄러운 마우스 클릭 소리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아버지 술주정도 더는 보지 않아도 된다. 겨울철 좁은 창고에서 추위에 덜덜 떨지 않아도 된다. 평생 여자 손 한 번 잡아 보지 못하고 죽게 되겠지만,,, 그리고 모두에게 잊혀지게 되겠지만,,,
집에 도착했다. 토토가 나를 가장 먼저 반겨 준다. 오늘은 토토의 생일이다.(참고: 토토는 2014년 1월 29일에 태어났다. 그리고 토토가 우리 집에 온 것은 2014년 3월 30일 즈음이다.) 예전에는 시저에 개껌을 꽂아 케이크를 만들어주곤 했는데 오늘은 그러지는 않았고, 내가 평소처럼 산책을 많이 해 주었다. 애초에 엄마가 시저를 주어도 먹지를 않는다.
라면을 먹었다. 샌드위치도 먹었다. 엄마가 바나나 우유를 주시며 힘내라고 하셨다. 오늘은 테니스 레슨이 없다. 그래서 푹 쉬기로 했다.(라고 말해 놓고 새벽까지 이 일기를 쓰고 있다.)
1/30(화):
눈 뜨자마자, 여자 생각을 했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다. 지나갔기에 아름다운 것이고, 지나갔기에 아쉬운 것이다. 그럼에도 미련을 놓지 못하는 건, 더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인 것 같다. 아프다. 그렇지만 그만큼 더 나아진 데가 있을 것이다.
점심으로 김밥 한 줄, 맘모스빵을 먹었다. 그리고 줄곧 시를 읽었다. 요즘은 작곡, 철학 공부를 거의 하지 않고 있다. 복합적인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것들은, 뭐랄까, 너무 높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언젠가는 다시 흥미가 생기겠지.
형 앞에서 트월킹을 추다가 얻어맞았다. 애플워치가 내가 심하게 다친 것 같다며 구조 요청을 제안했다.
토토 산책을 하고, 형과 테니스를 치러 갔다. 즐거이 랠리를 하고, 두 게임을 쳤다. 모두 졌지만 알찼다. 집에 돌아오니 토토가 우리를 오지게 반겨준다.
군 입대를 지원했다. 공군 운전병(1지망), 해군 수송병(2지망), 육군 운전병(3지망)이다. 이번에는 붙어야만 한다. 봉사 등 가산점을 열심히 모았으니 기대를 걸어 볼 만하다. 운전병이 되면 운전 연습을 공짜로 할 수 있다. 기왕 가야 할 군대, 조금이라도 더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내고 싶다.
1/31(수):
8시에 기상했다. 5시간밖에 못 잤다. 피곤하다. 오전 9시, 북한산 장미테니스장 예약을 했다. 우리 클럽을 위해서... 서버가 터진다~~~ 내 몫은 다 했다.
저녁으로 피자를 먹었다. 형이 쿠폰으로 샀다. 맛있었다.
롤 몇 판을 했다. 모두 지기만 했다. 재미없다.
내 수중에는 약 이천만 원 정도의 돈이 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써 오던 대신증권은 수수료가 비싸고 UI가 구려 헤어질 때가 됐다. 이제는 굴리는 돈이 제법 커져,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세금과 수수료를 고려해야만 한다. ISA 계좌를 개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부터 여러 증권사의 이벤트와 수수료를 비교하고 있다. 나 같은 족속은 직업을 구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불로소득을 늘려 놓아야 한다. 우선 밥이 있어야 글도 있고 음악도 있다.
무엇을 위해 이리도 처량하느냐. 다만 그것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후기]
2024년 1월 일기가 끝났다. 일찌감치 성실하게 일기를 쓰지 못한 것이 몹시 후회된다. 뒤늦게 옛일을 더듬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렇지만 이제라도 일단 시작하고, 꾸준히 한 것은 잘한 일이다. 여전히 헤매고 있다. 그래서 노력하고 있다. 더듬더듬 더 나아질 것이다. 계속해서 갈망하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외다.
[문제점]
1. 자세히 적으려는 욕심에, 정작 핵심적인 메시지는 모호해졌다. 이래서는 읽는 이도 쓰는 이도 모두 지치기만 한다.
2. 자기반성보다는, 남을 헐뜯는 말이 대부분이다. 나의 이기적이고, 찌질한 밑천이 여기서 드러났다. 그동안 써 온 글들이 부끄럽기만 하다.
3. 대부분의 언행이 순수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단지 명예를 얻거나 여자의 관심을 구걸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하아아... 나는 예전부터 그랬다. 그게 내 이미지를 깎아먹는 일임을 알면서도. 습관처럼.
오랫동안 글을 써 왔지만, 여전히 나의 영혼은 외롭다.
말은 많은데, 앎이 없다. 감동도 즐거움도 없다.
이유 없는 결말은 없다. 자기 연민에 남 탓은 이제 그만.
내가 놓인 이 좁은 공간에는 무슨 역사 무슨 일이 아득해서 멀고 멀게만 느껴지는 이 작은 한 점. 아쉽고 감격스럽고 서운하고 슬프고 나는 또 얼마나 작아져서. 도대체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이 빚을 어떻게 갚을 셈이냐?
2023년 올 한 해도 가삐 지나갔다.
안녕?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복잡한 마음에 쉽사리 생각이 꾸려지지 않는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성인이 되었다는 것이고, 그 외의 본질적인 문제들은 여전히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다.
집중력이 떨어져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외로움은 하염없이 짙어져만 가고, 증오도 사그라들 생각을 않는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슬픔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사람들에게 죄송스럽다.
아니야. 그래. 단순하게 생각하자. 새해 소망은, 여자 가슴 만지기!
인터넷 공간에 나의 명함(포트폴리오)을 마련하고 싶었다.
블로그, 유튜브 채널 등 나와 관련한 사이트들을 한곳에 모아 주는 기능이 필요했다.
linktree라는 서비스를 찾을 수 있었지만, 대개 그런 것들은 자유로운 커스터마이징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손수 간단한 홈페이지를 만들어 보았다. (Minecraft 게임 서버를 운영하며 쌓은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1. 호스팅케이알에서 일 년에 10780원짜리 mogos.kr 도메인을 구매. (Logos라는 단어와 내 이름의 초성인 mgs를 합친 것이다.) (짧고, 부르기 편하고, 좋은 뜻이 있으면서, 다른 사람이 선점하지 않은 도메인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적절한 도메인을 찾느라 진땀을 뺐다. 이기적인 도메인 리셀러들이 미웠다.)
2. 카페24에서 한 달에 500원짜리 저렴한 호스팅을 구매.
3. 유명한 설치형 블로그 중 하나인 WordPress를 이용하여 간단한 홈페이지 제작.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추진하는 일은 무엇보다 많은 깨달음을 준다.
앞으로 이 공간을 더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나를 설레게 한다.
중국고.중세철학사 - 홍성민
<논어 골라읽기> 파일 및 그외 <논어>의 구절들을 읽고
하나의 주제를 잡아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서술하기
분량: A4 1.5매 이내
일시: 10월8일 23시 59분까지
자율과제이므로,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입니다.
안한다고 감점은 없으며, 할 경우 최대 5점을 부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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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출일시 2023.10.08 오후 8:36:29
문건서입니다. 짧은 생각을 내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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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 "선생님께서 품으신 이상을 듣고 싶습니다."
공자: "나는 노인이 편안하게 살기를, 친구들이 서로를 믿기를, 아이들을 품어주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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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인간답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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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다.
먹고 싶어. 만지고 싶어. 화내고 싶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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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그러나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
그런 나를 사랑하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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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가 나를 무시했을 때,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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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는,
너를 사랑한 게 아니라,
너를 사랑하는 나 자신을 사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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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돌아올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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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 언젠가는,
품에 안긴 아이였겠지.
누군가의 친구였겠지.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었겠지.
내 운명이라 한들 무엇이 다르겠는가?
무엇이 다르겠는가?
2. 파르메니데스의 사상 그리고 원자론자들 (2023***** 문건서)
2.1. 존재의 특성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존재에는 몇 가지 특성이 있다.[1]
첫째, 존재는 생성되지 않는다. 만약 존재가 생성되었다면 존재 혹은 비존재로부터 생성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존재로부터 생성되지는 않았다. 존재가 존재로부터 생성되었다면, 존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이는 존재가 언제나 있어 온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2] 비존재로부터 생성되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있지 않다면, 존재가 생성될 원인 역시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성은 없다. 소멸도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존재했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존재할 것이다.[3]
둘째, 존재는 변화하지 않는다. 변화는 ‘생성과 소멸’로 이해되는데, 존재는 생성하지도 소멸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각 경험으로 보여지는 자연의 변화는 다만 착각에 불과하다.
셋째, 존재는 분리되지 않는다. 존재가 분리되려면 그것이 움직일 빈 공간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빈 공간은 있지 않다. 만일 빈 공간이 존재하다면, 그것 자체가 존재이므로, 존재는 계속적이다. 반면에 빈 공간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것은 비존재이므로, 존재는 계속적이다.[4] 따라서 존재는 분리되지도 움직이지도 않는다. 결국 논리적으로, 존재가 분리되지 않으니 — 존재와 비존재가 양립할 수 없으니 — 세계는 시간도 운동도 변화도 없이 단단한 물질로 꽉 채워진 한 덩어리(유한한 구)로만 있게 된다.[5]
2.2. 두 가지 대립하는 사상의 종합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여름이 오면 매미가 울고, 가을이 오면 낙엽이 지고, 겨울이 오면 눈이 내린다. 정녕 우리 눈에 보이는 자연의 변화는 거짓된 것일까? 존재하는 것은 운동하지도 변화하지도 않는다는 파르메니데스의 논리적 결론을 수용하면서 자연의 변화를 목격하는 우리의 경험까지 설명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6]
이에 철학자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과 그것의 배후에 놓인 참된 실재를 둘로 나누어 보게 되었다. 즉 배후 세계의 실재(아르케)는 생성 소멸하지 않고 불변하나 눈에 보이는 현상 세계의 자연과 사물은 변화한다는 것이다.[7]
만일 아르케가 여러 종류라면, 아르케가 소멸하지 않더라도, 여러 아르케가 섞임으로써 그 비율에 따라 여러 사물이 생겨날 수 있다. 이로써 아르케 차원에서는 파르메니데스의 기준(불변)을 충족하면서도, 감각적 현상 차원에서 변화하는 자연 현상을 설명할 수 있었다.[8]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는 양극으로 대립하는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원자론자들은 파르메니데스로부터는 불변의 기본 입자라는 생각을 받아들였고, 헤라클레이토스로부터는 끊임없는 운동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였다. 이처럼 철학은 대립하는 여러 입장을 고찰하고 종합하며 발전해 왔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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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프랭크 틸리, “틸리 서양철학사”, 김기찬, 현대지성, 2020, p.60
B.러셀, “서양의 지혜: 그림과 함께 보는 서양철학사”, 이명숙, 곽강제, 서광사, 1990, p.43~45
"[철학아카데미] 김주연의 세상 친절한 철학사 03-2강: 존재와 진리 [파르메니데스]", 유튜브 비디오, 38:30, 게시자 "철학아카데미", 2021년8월27일, https://youtu.be/ga1zYcAdFvU?si=2P9a5on6Oha9VE1C
[1] "[철학아카데미] 김주연의 세상 친절한 철학사 03-2강: 존재와 진리 [파르메니데스]", 유튜브 비디오, 12:13~22:15, 게시자 "철학아카데미", 2021년 8월 27일, https://youtu.be/ga1zYcAdFvU?si=2P9a5on6Oha9VE1C
[2] 프랭크 틸리, “틸리 서양철학사”, 김기찬, 현대지성, 2020, p.60
[3] 프랭크 틸리, “틸리 서양철학사”, 김기찬, 현대지성, 2020, p.60
[4] 프랭크 틸리, “틸리 서양철학사”, 김기찬, 현대지성, 2020, p.60
[5] B.러셀, “서양의 지혜: 그림과 함께 보는 서양철학사”, 이명숙, 곽강제, 서광사, 1990, p.43
[6] "[철학아카데미] 김주연의 세상 친절한 철학사 03-2강: 존재와 진리 [파르메니데스]", 유튜브 비디오, 27:38~28:45, 게시자 "철학아카데미", 2021년 8월 27일, https://youtu.be/ga1zYcAdFvU?si=2P9a5on6Oha9VE1C
[7] "[철학아카데미] 김주연의 세상 친절한 철학사 03-2강: 존재와 진리 [파르메니데스]", 유튜브 비디오, 28:45~30:50, 게시자 "철학아카데미", 2021년 8월 27일, https://youtu.be/ga1zYcAdFvU?si=2P9a5on6Oha9VE1C
[8] "[철학아카데미] 김주연의 세상 친절한 철학사 03-2강: 존재와 진리 [파르메니데스]", 유튜브 비디오, 34:52~37:20, 게시자 "철학아카데미", 2021년 8월 27일, https://youtu.be/ga1zYcAdFvU?si=2P9a5on6Oha9VE1C
[9] B.러셀, “서양의 지혜: 그림과 함께 보는 서양철학사”, 이명숙, 곽강제, 서광사, 1990,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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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고.중세철학사 수업, 파르메니데스 발표 보고서의 일부(내가 조사한 부분)를 블로그에 업로드한다.
>> 새로운 스승을 찾다.
9월 17일 에타(학교 인터넷 커뮤니티)에 무료로 작곡을 가르쳐 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나 인연을 맺었다.
오후 1시, 오늘은 도서관 휴게실에서 그에게 기본적인 scale(음계) 몇 가지를 배웠다.
이러한 scale들을 모두 암기하는 것은 물론, 음악을 듣자마자 그 곡의 scale을 알아맞힐 수준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로써 그동안 무심했던 청음 연습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인복도 이런 인복이 없다... 열심히 해야 한다.
>> 외대에서 테니스를 치다.
오후 4시부터 해질녘까지 테니스를 쳤다.
운동이 끝나고 3명의 동아리 부원들과 근처 식당에서 샤브샤브를 먹었다.
군대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미필인 나는 거의 듣기만 했다. 공군을 가라는 추천을 받았다.
이것은 거창한 주제의 대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과 함께 웃고 떠든 그 자체만으로 왜인지 나의 마음은 산뜻해졌다.
기숙사에 들어오기 전(1학년 1학기 때), 하루에 왕복 4~5시간 정도를 통학에 쓰느라 사람들과 어울리기는 커녕 잠을 잘 시간조차 부족했었는데, 이제는 사정이 훨씬 나아졌으니 다행이다.
운동하자. 사람을 만나자. 성실히 공부하자. 결코 우울감이 자리잡을 틈이 없도록.
어제는 교양 수업에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어, 수업이 끝나고 용기 내어 전화번호를 물어보았다. (몇 주 동안 고민해서 내린 결정) (그 사람과 접점이 전혀 없다 보니 이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너무 예쁘셔서 그런데, 전화번호 좀 알려주실 수 있냐고...
또 거절당했다.
내 얼굴도 보지 않고 손사래를 치며 가 버리셨다.
반지는 끼지 않았던데,,, 남자친구가 있으셨나 보다.
좋아하는 마음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싫어하는 마음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비슷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반대로 과거에는 몇 달 몇 해를 머뭇대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놓치고 후회한 적도 많다.
몇 달 전부터 꾸준히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머리도 펌을 넣어 꾸며 보았다.
시도도 하지 않고 한탄하는 것과, 온 힘을 다해 부딪치고 쓰러지는 것의 무게는 다르다.
그래서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부단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런 게 어디 있누나?
기쁜 날은 그저 기쁜 것이고,
울적한 날은 그저 울적한 것이다.
그 가운데 삶이 있다.
그래도 나 사람 취급해주는 건 너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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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시 하늘이 이렇습니다.
그래도 나름 희망적인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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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그렇거든요, 1년 365일 살고 싶지도 죽고 싶지도 않은 마음으로 망상에 빠져있으면, 결국 예쁜 하늘. 매미 울음소리. 그 사소한 게 그렇게 따듯하게 느껴지는 걸요.
사실 다들 저를 어떻게 보는지,,, 다 알고 있어요. 아무런 이유 없이 차단도 당해 보고. 그런 비슷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라서. 대부분 나를 보며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테지요? 뭐 괜찮습니다. 이런 건... 정말 별거 아닌 사례입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닿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10년 후가 됐든 100년 후가 됐든 녹아내리지 않는 게 있어요. 그러니까 언젠가는요, 언젠가는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자꾸만 눈앞에 헛것이 보인다. 환청이 들린다.
교사들. 교사. 선생. 선생님. 모두 악마처럼 느껴진다.
그들이 나를 어떤 방식으로 대했는지, 나를 무엇으로 여겼는지, 단 한순간도 망각할 수 없었다.
얼마 전 뉴스에서 한 초등학교 교사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분개한 교사들이 일어나 시위를 하는 것도 보았다.
대중의 반응도 매한가지이다 : '안타깝다.', '교권을 강화해야 한다.', '선생님들이 고생하신다.'
하지만 왜인지, 내 눈에는 그 모습이 벌레 떼처럼 비춰졌다.
도저히, 도저히, 떨쳐 낼 수 없었다.
당초 나는 몇몇의 '그릇된 교육관'이 미웠던 건데, 나도 모르는 사이 '교사 전체'를 혐오하게 된 것이다.
이는 매우 위험하다. 괴물. 괴물들을 상대하다가, 그만 나까지 괴물이 되고 말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온다.
몇 년째 이렇게 시달리고 있으니, 나는 죽어도 좋은 사람은 못 되겠군.
다만 한 뼘의 사랑이라도 받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럭헤 내가 ㅄ 같은가? .............ㄷ므ㅝㄹ어떻게벗언나야합니까?
나는ㄴ뭐때문에이렇게되었습니까? 뭐무슨잘못을했나요?단지, 단지, 사랑ㄷ이 받곳 ㅣㅍ었던 거 아닙니까? 그게 그렇게 잘못됐습니까>?사람을사랑ㅎ라고, 가장사람답기를 바랐고, 그저 사그 저
평생 ㅂ.ㅅ같이 살다가 죽는 건가?
그게 내 운명인 거에요?
ㄴ ㅐㄴ ㅇ ㄴ놈ㅇ이,ㄴ내 운명인거에요?
내 운명인 거에요? 운명인 거에요? 운명인 거에요? 운명인 거에요ㅕ?>
당신은. 내가 무섭ㄴ나요?
불쌍한가요?
한심ㅎ나가요?
이해할 수 없나요/?
나쁜 놈. 관심이 1도 없는 거겠지. 나쁜놈. 넌 진짜 나쁜놈이야. 너는. ㅓ너 때문에, 너가, 내가, 나쁜 놈이 된 거야. 너 때문에 너 때문에 ㅠ퐃ㅎㅎ휴ㅜ포ㅓㅓ
밤 10시입니다.
호젓한 산길을 걷습니다.
하늘은 흐리지만 비는 내리지 않고,
공기는 습하지만 시원스럽습니다.
이런 날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요?
Machinarium 같은 게임의 BGM은 도대체 어떻게 만드는 걸까 늘 궁금했었는데, 요 며칠 Splice에서 양질의(미천한 내 수준에 비해 압도적인 퀄리티의) Sample들을 들어 보고 나니 '내가 해야 할 일은 다만 숟가락 얹기 뿐이로구나'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동안 나는 완전히 삽질을 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비단 음악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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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글들이 그랬다.
내가 한 생각들이 그랬다.
이미 만들어져 있던 것들이고,
이미 누군가가 개척한 길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해)
다 뻘짓이고, 시간낭비였지.
그동안의 인생이 모두 부정당하는 기분 아실랍니까?, ㅋ
그러니까, 정보의 바다 속에서 나는, 한편으로 외로우면서, 두려우면서,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이제라도 내 잘못을 깨달았으니 다행이다.
#현대사회와철학은 오희철 선생님(한국외국어대학교)의 강의 중 하나이다.
#과제 제출을 미루고 미루다, 마감 몇 시간 전에 부랴부랴 작성한 내 답안은, 강의자료를 거의 있는 그대로 가져와 어설피 요약한 정도에 그친다.
#나는 칸트의 도덕 법칙에 커다란 거부감을 느낀다. 그의 이름이 교재에 나올 때마다 몸이 부르르 떨린다. (그러니까 이건... 삐뚤어진 사랑인 셈이지.)
1. (a) 자연법칙의 정식과 (b) 목적의 정식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c) 정언명령이 어떠한 절차로 이해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d) 두 원리가 인간의 마음을 구현한 인공지능 로봇들에게까지 확장될 경우, 우리가 인간의 마음을 구현한 인공지능 로봇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시오.(20점)
2. (a) 도덕적 덕에 대한 설명을 바탕으로 (b) 다원주의 윤리학이 어떠한 입장인지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c) 행복주의적 규칙 공리주의를 받아들이는 표준적 행위 중심 윤리학이 어떠한 입장인지 구체적으로 제시한 후, (d) 인간의 마음을 구현한 인공지능 로봇들이 도덕적 덕을 함양하는 것과 관련하여 두 입장이 어떠한 차이를 가지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시오.(20점)
{철학입문 기말고사 리포트.}
이메일 제목 : 철학입문 기말고사 과제 제출합니다. (2023***** 철학과 문건서) 오후 4:48
안녕하세요. 박치완 선생님.
2023***** 철학과 문건서 과제 제출합니다.
오랜 기간 준비한 글이지만,
저 스스로도,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걸 압니다.
완성되지 않은 글을 보내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더 성장한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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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생명 윤리를 주제로 한 다양한 관점(인간 중심주의, 동물 중심주의, 생명 중심주의, 생태 중심주의) (천부인권의 역사적 등장배경, 법에서 말하는 인권,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존엄성)의 책과 자료들-논문들을 읽어보자. // 생명의 본질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이 담긴 책도 읽어보자. 진화론, 생물학. 등. // 분석철학도 조사해보자
이 글 제대로 완성하려면, 철저한 자료 조사가 필요하다.
요기 사이트(국가생명윤리정책원) 참고해보기
좋은 자료를 인용해가면서 글을 구성해야 하는데, 자꾸만 빈약한 뇌피셜로 글을 싸지르게 된다. 부적절한 용어를 마구 남발하였다. 아마... 나중에는 이 글을 완전히 갈아엎게 될 거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나’를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문건서라는 이름은, 후천적으로 부여받은 나의 이름일 뿐이지 내가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지위는, 나의 국적일 뿐이지 내가 아니다.
나의 몸무게도, 나의 키도, 나의 성격도,
어느 것도 ‘나’를 온전히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m
살인이 왜 나쁜 걸까? 인간은 왜 존엄한 걸까? ‘아무튼 그렇다’는 말 외에는 어느 누구도 적절한 해답을 내놓지 못한다. 절대적인 가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테세우스의 배, 무아론
어릴 때의 문건서와 성인이 된 문건서를 비교해보자. 한참 전에 문건서를 이루던 세포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세포들이 문건서를 구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거의 문건서는 사라진 것인가? 문건서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나'라는 의미는 허상에 불과한 것 아니었을까? 나라는 의미는 없고 나는 단지 우주의 원자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천을 확대해서 보면, 천은 천으로서 존재하지 않고 각각의 실들로서 존재하고 있다. 멀리서 보았을 때만, 천이 천으로 보였던 것이다. 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주아주 작은 것이 가까이 모여살기에 그렇게 보였을 뿐이었다. 모든 것들은 붙어있지 않기에, 그 사례로 시간이 지나면 내 몸은 흙으로 돌아가기에, 인간적인 의미를 빼놓고 본다면 내 앞의 돌덩이와 나는 사실 하나의 몸일지도 모르겠다. 내 몸도 각각의 분리된 분자들로 구성되어있고, 돌덩이와 나도 조금 더 먼 거리로 분리되어있다. 더 크게 보면 나와 우주는 한 몸이다. 그래서 나라는 의미는 명확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이 그렇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의미만으로 세상을 판단하기에 나 자신이 살아있다고, 그리고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삶과 죽음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2021. 11. 8. 사나 죽으나 소립자임은 같으므로) 인간의 눈을 빼놓고 보았을 때 죽음과 삶의 차이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생사일여) 인간의 세상은 인간이 전부이다. (2021. 10. 19. 허무한 관점에서, 우리의 모든 행동은 '우주가 흘러간다.'는 동등한 지위의 일에 불과하다. 나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 눈을 빼놓고 생각한다면..... ‘나’의 실체는 없다. 자아는 없다. 그렇다면 사람이라는 표현도 존재할 수 없다. 모든 표현이 존재할 수 없다. 다만 삶과 죽음과 같은 개념들은 오직 해석주체에 의한 ‘잠정적 약속’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인간의 입장 없이 정의내릴 수 있는 의미는 존재할 수 없다.] ['신'은 없고, ‘나’도 없으므로, 결국에는 나의 입장(해석)만이 남는다.] [입장만이 남으므로 개인의 입장과 무관한 신성한 원칙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 우주에서는 우주의 법칙에 따른 모든 일이 허용된다.]
수정된 '나'는 내가 아닐까?
수정된 '나'가 내가 아니라면, 치과에서 치아를 수정한 '나'도 내가 아니게 된다. 나이를 먹어가며 수정된 '나'도 내가 아니게 된다. 허무한 관점으로 보아 '나'라는 독립적인 의미는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그저 주관적인 해석 때문에 '나'가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을 뿐이다.
내 몸과 외부와의 경계를 정의하는 것도 인간이 부여한 의미일 뿐이다.
주관적으로 삶과 죽음은 구별되지만,
객관적으로 삶과 죽음은 구별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잠정적 약속)'에 불과하다.
소립자는 존재하지만,
인간(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 소립자 뭉치는 인간의 눈 ㅡ 생명의 해석 ㅡ 으로 인해 고유의 가치를 부여받게 된다.
우주는 지구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
우주에서 인간만이 대단하고 특별한 존재라는 오만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외계 생명체는 반드시, 무수히 많은 수로 존재한다.
의미는 물질로 이해될 수 없다.
우리의 세상은 우리의 감각에 갇혀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다루는 언어는 우리의 감각(우리가 받아들이는 세상)을 다루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와 전혀 다른 감각을 지닌 생물의 감각을 이해(공감)할 수 없다.
음악은 진동으로 환원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음악(진동)이 어떤 느낌을 주는지는, 그 생물의 기준인 감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음악을 틀고 스피커를 손으로 막아봐라. 스피커의 진동을 손으로 느껴봐라. 그리고 손을 떼고 음악을 귀로 해석해보라. 같은 우주를 두고도 감각의 종류에 따라 해석은 다르다. 상자는 원자로 환원될 수 있다. 그렇기에 상자는 무의미해 보이는 듯 하다. 하지만 나는 감각을 가진 인간으로서, 상자가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든, 어떤 크기이든, 나는 상자가 상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각, 상자의 용도 등으로..) 이것은 나는 나의 감각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근거이다.마지막 예시로, 음식은 물질로 환원될 수 있다. 하지만 생명의 감각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이 음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단백질로 이루어지는 것이 음식인가? 탄수화물로 이루어지는 것이 음식인가?그렇다면 개 사료(꼭 개 사료가 아니더라도, 사람만 먹을 수 없는 것)는 음식인가? 아니라고? 그것은 왜 음식이 아닌가?이는 인간의 감각이 음식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시는,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나의 글이다. 사실 이것은, 그저 먹물이 마구 흩뿌려진 종이와 같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을 해석하여,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다.]
@
저 통나무에 의자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건 인간이지, 저것에 처음부터 의자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저 통나무는 누군가에겐 땔감이 될 수도, 누군가에겐 배가 될 수도, 누군가에겐 발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물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물질 너머에 @본질(의미)이 있다.
저 바위, 벤치
재료가 무엇이든, 앉는 데 쓰인다면 그것은 의자이다.
이는 의미 부여의 주체가, 신이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m@
형식이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이 품은-내포하는 의미가 중요한 것이다.
가령 ‘니취팔러마’라는 말은
이것이 안부 인사로 들리는 중국에서 문제될 것 없겠지만,
이것이 욕처럼 들리는 한국에서 문제가 될 것이다.
축구에서 공을 발로 모는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농구에서 공을 발로 모는 것은 문제가 될 것이다.
총을 사람을 죽이는데 쓴다면 나쁘겠지만
총을 사람을 지키는데 쓴다면 좋을 것이다.
(총은 그 자체로는 가치 중립적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용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
신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 모습이 어떻다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신은 우리에게 무관심하다. 이것만큼은 분명하다. (근거, 사례 추가하기 : 이 넓디 넓은 우주에서, 우리만을 특별하게 바라봐줄 이유가 없다.)
[에피쿠로스의 역설
신은 악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전능하지 않은 것이다.
악을 막을 능력은 있는데 의지가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한 것이다.
악을 막을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이 세상의 악은 어디에 기인한 것인가?
악을 막을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그를 신이라 불러야 하는가?]
어째서 신은 약자에게 무관심하고,
어째서 신은 독재자를 처벌하지 않는거고...
우리가 직접 나서서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문제이다.
주관을 배제하면, 생명과 여타 물질 간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까?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여타 물질과 마찬가지로 생명은 우주의 구성 물질에 속한다.
@만물의 차등적인 가치는 절대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주체(생명체) 각각의 가변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에 비롯된다. 따라서 가치는 절대적이지 않다.@생명의 존엄성도 마찬가지로 해석에 의한 가치다. 주관적인 해석을 벗어나면 만물은 고유의 의미를 상실하고 다 똑같은 원자가 된다. 생명도 마찬가지로 해석을 벗어나면 고유의 의미를 상실한다. @해석은 하나로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점에서, 신이 정한 절대불변의 의미(존엄성)를 갖는 존재는 없다. @@@이러한 원리는 여타 물질과 마찬가지로 우주의 구성 물질인 생명의 존엄성에도 적용된다.
우리를 물질로 환원하여 우주 자체로 생각한다면, 압도적으로 광활하고 덧없는 우주에서 우리는 당연히 별 의미가 없는, 심지어는 사람의 형태라는 것이 특정될 수도 없는 물질, 한낱 우주의 먼지에 불과하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 모른다. 어떤 가치를 가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째서 우리의 감정이 소중할까? 어째서 삶은 소중하고, 어째서 인간은 존엄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내 생각은, 우리의 세상은 우리의 감각에만 갇혀있기 때문에, 우주에서의 우리가 얼마나 무의미하고 작고 유한한 존재이건간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 우울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주에는 @객관적-절대적인 미(선악 판단)의 기준이 없지만, 우리의 주관은 사물에 아름다움을 부여할 수 있다. 거대한 우주에 압도되어 자신 주변의 조그마한 가족과 이웃이 무의미하다며 한탄하지 말자. 의미의 원천은 신도, 사회도 아닌 바로 '나'의 주관이다.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이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隨處作主 立處皆眞) / 선과 악은 오직 인간(해석주체)만의 기준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주로부터의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옳지 않다고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우리의 세상은 우주이므로, 우리의 일상이 어떻든, 우리는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의 영향을 받는다.[2021. 9. 15. 인간의 입장을 위해서 생각해야 할 우주이다.]
(+생명의 기원은 화학 반응으로 인한 원시세포 ㅡ 유기화합물의 등장이었다! 추가하기 : 참고영상 https://youtu.be/hjJNdlCUt0o)
인간의 선택에는 물질적인 뇌의 작용이 선행됨을 확인한 벤자민 리벳 실험(참고 : https://brunch.co.kr/@ys1j13/15)은, 물질과 정신은 분리되어있다는 기존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심각한 불신을 초래했다. 이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행동은 우주의 흐름에 따른 결과로 여겨진다.
{한국외대 오희철 선생님의 수업내용: 정신적 상태들은 두뇌 상태들이다. 두뇌 상태들은 물리적 상태들이다. 따라서 정신적 상태들은 물리적 상태들이다. 물리적 상태들은 원인과 결과의 연쇄로 이루어진다. 정신적 상태들은 원인과 결과의 연쇄로 이루어진다.}
{모든 일이 원인과 결과의 연쇄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앞으로 일어나게 될 모든 사건들은 이미 (확률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운명인건가?}
모든 생명체는 현실적인 영향 아래 놓인 물질이기 때문에, @우리는 잠을 못 자서 예민했었고 칭찬을 들어서 기분이 좋았었고 밥을 굶어서 치킨이 먹고 싶었었다. @이 일이 일어났기에 저 일이 일어났다. A가 일어났기에 B가 일어났고, B가 일어났기에 C가 일어났다. 모든 일엔 인과가 있다. @이렇게 우리의 선택은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모든 생명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니고, 그저 현실적인 영향 아래 놓인 물질-영혼 없는 사물에 불과하다. 그렇게 우주는 흘러간다.
@일원론적-기계론적 관점에서 모든 것이 소립자로 이루어져 있다면, 모든 사물은 동일한 소립자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현실 모든 사물은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해석은 필연적으로 현실을 왜곡하고, 따라서 해석주체의 주관은 차등적 의미 부여의 유일한 근거이다. 이를 배제하고 오직 '@@@물자체'만을 상상해보면; 죽은 것이나 산 것이나 모든 것은 똑같은 소립자로 이루어져 있을 뿐 이들 간에 우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는 개념은 허상에 불과하다. 삶과 죽음은 구분되지 않는다. 슬롯머신을 두고 비유해볼까? 무작위 세자리 숫자를 두 번 뽑아보았다. ㅡ [결과값 : 308, 777] ㅡ 인간에게 있어서 777은 308과 달리 특별해보이겠지만, 실은 308도 777과 마찬가지로 극히 낮은 확률을 뚫고 나온 값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인간이 십진법을 쓰지 않았더라면 777은 '잭팟'이라는 의미를 부여받지 못했을 것이다.
방금 보았듯, 해석주체의 주관; 그 바깥의 신성하고 독립적인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주관을 벗어나면 모든 존재는 특유의 의미를 상실하고 '그냥 소립자 여러 개(무미건조한 현실)'로 @추락-변모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는 생명의 도덕적 지위 상실 : 생명의 가치적 의미는 물론 생명을 정의하는 의미 자체의 소멸이다. 이러한 @허무적인 입장에서, 모든 사건은 '우주가 흘러간다.'는 동등한 지위를 가진 일에 불과하다. 따라서 생명체를 노예로 쓰든 고기로 먹든, 그것이 우주(물리법칙) 안의 일이라면 신은 침묵한다. 오직 해석주체들만이 울고 웃을 뿐이다.
해석주체가 있기에 좋은 것이 있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다.
좋은 것 나쁜 것이 독립적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절대적인 나음과 못함, 선함과 악함은 없다.
절대적인 ‘잘생김', ‘못생김'이라는 것은 없다. 절대적인 ‘선함’, ‘악함’이라는 것은 없다. 모든 개념들은 잠정적 약속(가치)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상황에 따라, 시대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
잘생긴 사람이 잘생겼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우리의 유전자(해석)가 코가 오똑하고 피부가 고운 사람이 생존에 유리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세상 만물이 주관적(일시적) 해석의 대상이다.]
[@‘주관’은 유동적이며,
그것에서 비롯한 가치 판단은 잠정적이고, 일시적이고, 임시적이고, 한시적이다.]
아름다운 것과 추악한 것을 구분하는 건 오직 해석주체의 주관이지, 절대적인 의미는 없다.
똑같은 음식을 먹고도 배고픈 사람은 감사함을 느끼는 반면 배부른 사람은 거부감을 느낀다. 똑같은 벌레를 보고도 사람은 혐오감을 느끼는 반면 같은 벌레끼리는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사람에게 더럽다는 것이, 파리에겐 깨끗한 것일 수 있다.
똑같은 민트초코를 보고도, 누구는 혐오감을 느낄수도, 누군가는 군침이 돌 수도 있다.
같은 것을 보고도 저마다 해석은 다르다. 똑같은 우주를 두고도, 각각의 해석주체마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다양하다. 의미는 고정되지 않는다. 신이 정해준 의미는 없다(=절대적인 의미는 없다). 다만 끊임없이 다양하게 변화(개체의 진화와 순간적 변화를 모두 포함하는 의미에서 쓴 말이다. // 유전자의 다양성과 변동성)하는 신체의 욕구만을 따른다. 행복하기 위해선 이러한 각 해석주체의 차이, 취향(각 해석주체 고유의 해석 방식)를 존중하며 살아가야 한다.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에게 남자를 좋아하라고 강요할 순 없듯이,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에게 여자를 좋아하라고 강요할 순 없다. (개체들 간 이러한 입장차는 다툼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철학책은 라면 받침대일 뿐인 반면, 문건서에게 그 책은 귀중한 보물로 여겨진다. (같은 물체를 두고도 쓰임새가 다르다.)
[내가 인간으로서 본성적으로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 인간은 소중하다.그러나 인간이 그 자체로 존엄한 것은 아니다. 객관적으로 죽은 것이나 산 것이나 모든 것은 마찬가지로 소립자로 이루어져 있고, 인간이 특별할 것은 없다. 호랑이에게 인간은 먹잇감으로 해석될 뿐이다.]
똑같은 물체를 손으로 만질 때의 느낌과 눈으로 볼 때의 느낌이 다르듯이 의미부여는 감각이 하는 것이며 절대적인 의미는 없다.
더럽든 깨끗하든, 보지도 듣지도 맡지도 아니하면 다를 것이 있겠는가?
각각의 생명체들은 분리되어있다. 남이 아픈 것을 내가 그대로 느끼지는 못한다. (모든 것은 독립적인 의미를 가지지 못하므로, 해석주체가 느끼지 못하는건 의미 상실로 이어짐.) 간접적인 감각으로 일부 공감할 뿐이다.
즉 나에게 있어서 모든 생명(존재)은 (독립적-절대적인-특별한 의미를 가진 존재가 아닌) 내 주관대로 해석해야 할 (동등한 지위의) 우주일 뿐이다. 해석의 대상일 뿐이다.
나에게 있어서 돼지는 음식이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다.
대상이 어찌되든 나는 그저 배고픈대로, 사랑하는대로 그것을 대할 뿐이다.
결국 개인의 공감조차 얻지 못하는 벌레 등은 소중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벌레의 입장에서 인간은 소중하지 않을 것이다. 서로의 존재가 서로에게 피해를 준다면 언젠가 외계 벌레와의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즉 동물의 고통에 대한 간접적 공감 능력만이 천성인거지, 그 밖의 분리된 개체와의 도덕적 동등성 간주는 비인간적 규범에 해당한다.
근본적으로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할 이유는 없다. (남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도,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입장-욕구-가령 동정심과 같은 것에서 비롯된 것임.) -> 개인의 입장을 강조하면 개인이 존엄한 것 같겠지만, 그것은 오해이다.개인의 입장에서, 종종 개인은 버려지기도 한다. (모성애 등등..)개인의 입장이 의미라는 진실된 착각을 부여하는 것이지, 개인이 고귀했던 적은 없다. (개인도 돌멩이와 다를 바 없는 물질이다.)개인의 입장만이 가치 판단의 근거이다.개인을 위하지 않는 어떤 행동이 개인의 입장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옳다. (우주 어딘가에는 일부 상황에서의 자신의 죽음에 쾌락을 느끼는 생물체가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종족 유지에 도움이 된다면.) (그래서 신념을 위해 죽는 사람이 있는걸지도? 20211116)
@기차 딜레마
1명을 살리는 대신 5명이 죽는다.5명을 살리는 대신 1명이 죽는다.당연히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맞아보일 것이다.그러나, 건강한 사람 한 명의 장기를 죽을만큼 빼내어서, 혹은 건강하고 선량한 사람 한 명을 칼로 난자질하여 다섯 명을 살리는 것이라면 당신은 그런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나의 경우 이것은 옳지 않다고 느낀다. 수적인 결과가 훌륭한 것과 별개로 이는 인간의 감성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잘못되었다. 다섯 명을 살리는 것도 인간의 감성을 위한 것이고, 한 명을 죽이지 않는 것도 결국에는 인간적인 관점에 만족감을 불어넣기 위함인데, 그리고 똑같이 한 명을 죽이더라도 잔인한 방법과, 덜 잔인한 방법의 가치는 분명히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5명과 1명의 가치 둘 중 1명의 가치가 더 높은 경우가 존재할 수 있다.[더불어 그 1명(소수)이 내가 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사회 계약적 성격이 있을 수 있다.]
(수적인 결과의 절대적 가치 인정 -> 의미부여의 유일한 근거인 해석주체의 주관 바깥의 신성-독립적인 의미이므로 정당화될 수 없다.)
(같은 것을 보고도 해석은 다르다. 인간은 신성-독립적인 의미를 가진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해석으로 의미가 부여되었을 뿐; 우리는 모래밭에 원을 그릴수도, 별을 그릴수도 있다.)
@(개체만이 우주를 해석 --> 세상은 천이 아닌 각각의 실로 존재한다. 누군가는 모래알을, 누군가는 모래성을, 누군가는 모래밭을 인식한다.) (같은 모래밭=우주를 보고도, 의미를 부여하는 건 다양하다. 누군가는 모래밭에 별모양을 그릴 수도, 하트모양을 그릴 수도....) 모래성은, 모래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인간으로서, 모래성에게서 모래 그 이상의 가치를 느낀다.
나 또한 자연이다. 모든 것이 자연이다. 생물과 무생물은 구분되지 않는다.
다른 개체라는 자연에 적응하여 진화하는 동물들이다. 가령 개는 인간이라는 자연에 적응하여, 탄수화물을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감각 제외를 전제했을 때, 돌멩이와 다를 바 없는 무의미한 소립자의 집합체에 불과한 것이 바로 인간이다. 죽은 사람도 물질이고, 살아있는 사람도 물질이다.
따라서 유일한 의미 부여의 근거인 개체의 느낌[궁극 목적(모든 종류의 쾌락)]을 위해서라면, 심지어 살인까지도 때론 최선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오해하지말라, 나 역시 살인을 혐오한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살인이 아주 제한적으로는 허용될 필요가 있겠더라는 말이다.) (건강한 민주주의 국가의 사형 집행은, 궁극 목적을 위한 수단적 살인의 예시라고 볼 수 있다.)
태아가 생겨났다.
이것이 생명이 되는 기준은 언제부터인가?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직후?
태아가 이성적 사유가 가능할만큼 성장했을 때?
임신한 지 몇 주가 지났을 때?
출산 이후에?
해석은 다양하다.
어느 누구도 깔끔한 정답을 내놓지 못한다.
당초 ‘나’는 없고, 삶과 죽음은 구분되지 않고, 이 기준은 처음부터 확실한 절대적인 진리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주에서 이것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해석주체만이 생명의 기준을 정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다수가 동의하는 기준은, 약속(규범)이 된다.
이는 잠정적인 합의에 불과한 것이지, 영원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부모의 자유 의사에 따라
때론 낙태도 허용될 수 있다...
태아는 자연이고, 해석의 대상이기 때문.
태아는 힘이 없기 때문. (물론 잦은 임신과 낙태의 반복은 여성의 건강에 좋지 않고, 그리고 인간의 감성에 맞지 않으므로 자제해야한다.)
무조건 태아는 존엄한 인간이니까, 혹은 인간이 아니니까.
낙태에 대한 절대적 규범을 결정하는 토론 과정에서, 이렇게 신성함을 근거로 삼은 주장을 펼쳐선 안 된다.
절대독립적 의미를 가진 인간은 없고, 유동적 개체의 감정적 입장만이 의미부여의 유일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분리된 나에게 있어서 태아는 자연이다. 특히 힘이 없다; 부모의 사랑을 받을 수도, 못 받을 수도; 인간으로 느껴질 수도, 그저 핏덩이로 느껴질 수도 있는 작은 자연이다.
이렇게 똑같은 현실을 두고도 해석은 엇갈릴 수 있다. 즉 태아는 인간이자, 인간이 아닌 존재이다.
그렇다면 규범의 설정은,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한다.
내 개인적인 감상에 따르면, 태아는 십년 넘게 동고동락한 내 (가상의) 자식보다는 소중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낙태는 아프고 슬퍼서 자제해야 할 일이지만, 그 이상의 심각한 문제는 없다는 점에서 엄한 법으로 다스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나'는 정확한 정답이고, '우리'는 실용적 정답이라는 점! 다같이 의논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따라서 사회와 별개로 개인이(내가) 행복해야 한다
사회 전체의 이익에는 부합할지라도 그것이 지나치게 나에게 불평등하다면, 이에 저항해야 한다.
우리의 세상은 각 개인들의 세상이므로(사람들은 분리되어 있으므로, 모든 존재가 내 주관적 해석의 대상이므로), 남이 행복하더라도 내가 불행하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제로섬 게임: 예쁜 여자 한 명을 두고, 많은 남자는 경쟁을 벌일 것이다. 누가 그녀와 사귀게 되든, 공동체 행복의 총합은 거의 같다. 그러나, 사회와 별개로, 내가 그녀를 차지하고 싶다. 그게 나의 선이다.)
이를 위해 힘의 균형과 투쟁은 필수불가결하다.
국가는 개인을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로 근본 목적인 것은 아니다.
[동물이 존엄하지 않다면, 반대로 인간은 존엄한 존재일까? 전통적인 보통의 철학자들은 인간이 이성과 그로 인한 도덕심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여타 동물들과 달리 존엄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게나 존엄한 인간이 실은 불결한 원숭이와 같은 뿌리(조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진화론의 발견은, 그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인간 존엄성의 핵심적 근거인 도덕심이, 식욕 그리고 성욕과 마찬가지로 종족 보존을 위한 수많은 수단(진화의 산물)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었다니! 우리는 그렇게 이기적인 사랑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이성은 인간 존엄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인간이 여타 동물들보다 우세한 도덕적 권리를 지녔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능력의 차이가 도덕적 지위 차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능력의 차이는 무작위적인 진화의 산물이다. 현재 인간이 지구상의 생물종들 중에서 가장 힘이 쎄다고 해서 그들보다 우월한 도덕적 지위를 가졌다고 볼 수는 없다.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호랑이보다 약했었다.
우리 인간은 다른 동물들이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을 못 하기도 한다. 물고기처럼 물속에서 숨을 쉰다든지... 치타처럼 단거리를 빠르게 달린다든지...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능력의 차이가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존엄하지 않다는 근거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당연히 말도 안 되는 궤변이다.
마찬가지로 이성적 사고는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으로서 다른 동물들은 하지 못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존엄하다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이 또한 옳지 않다. 그저 다른 것 뿐이지, 모든 생명이 고유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인간의 이성을 찬양하는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능력에 따라 사람 사이의 존엄성도 달라진다.
좋은 대학에 간 사람은 더 존엄하고,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한 사람은 덜 존엄하고,
달리기가 빠른 사람은 더 존엄하고, 달리기가 느린 사람은 덜 존엄하고,
말도 안 된다.]
우리는 흔히 이성적 존재를 인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들 말대로라면 지적장애인, 어린이는 합리성이 부족하여 비록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상태이지만
우리는 그를 인간으로 대우한다.
우리가 느끼기에 그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해석주체의 주관이 유일한 의미부여의 근거이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이유로 여타 동물들과는 다른 차원의 도덕적 지위를 갖게 된다면, 인간보다 고등한 (가상의) 외계 생명체를 인간보다 우위에 두어야 할까?
허나 우리는 직관적으로, 외계 생명체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니 인간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흔히들 인간을 도덕적 존재라는 이유로 존엄하다고 하는데,
아니, 그 ‘도덕’이야말로 철저히 인간만의 기준과 감성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사고가 아니었던가?
m@
역사에 따르면, 천부인권이라는 개념은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대의 산물(약속, 규범)이다. {구체적인 사건(년도)을 제시하기}
미국 독립선언서를 보면, 인권이 창조주로부터 물려받은 권리라고 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가 창조자 때문이라니,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다.
이 개념이 등장하기 전까지 인권은 존중되지 않았다. 또, 이 개념이 등장한 이후에도 여전히 여러 나라에서 인권은 존중되지 않고 있다.
생명 권리(인권, 동물권)는 시대와 장소와 해석주체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비절대적 ‘가치’에 속하는 허상이다.
이것은 시대 장소를 불문하고 전 우주에 두루 통하는 절대적 ‘진리’ ㅡ 수학 : 1+1=2와 같은 논리, 과학: 수소 원자가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 과 같은 것들 ㅡ 과는 명백히 구분된다.
생명 권리는 해석주체의 해석에 의한 — 시대와 장소의 차이에 따라 구체적인 기준이 달라지는 — 하나의 ‘의견' 내지 ‘약속’에 불과하지,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철학자들은 인간에게는 도덕심이 있다느니, 이성이 있다느니, 쾌고감수능력이 있다느니 하며 인간이 존엄하다는 온갖 궤변을 늘어놓지만,
실은 사람이 그 자체로 존엄하니 소중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사람을 사랑해서 소중한 것이었다.
[반대로 호랑이 입장에선, 인간은 간식거리에 불과하지 호랑이가 존엄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사람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면, 동정심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모기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강아지가 생명이기 때문에 존엄한 것은 아니다. 애당초 산 것과 죽은 것은 구분되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눈에, 강아지가 귀엽기 때문에, 강아지는 존엄한 것이다.
생명이 여타 물질들과 구분되며 그 자체로 성스러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우리의 모순적인 본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고양이를 괴롭히는 일이 잔인하다 말하면서, 정작 모기를 잡아 고문하는 일에는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보신탕을 먹는 문화가 미개하다고 말하면서, 정작 삼계탕은 @호로록짭짭 잘만 처먹는다. 어릴 때부터 배운 규범이 어떻든 ㅡ @인위적인 의미에 집착하며 괴상한 신념을 고집하는 사람은 극소수 ㅡ 우리는 결국 자연스레 스스로가 느끼는대로 행동하게 된다. 이렇게 인간으로 태어난 세상에 인간이 느끼는 것 이외의 가치가 도대체 어디에 있다고 그러시는지, 욕구와 조화되지 않는 울타리(@잘못된 신념, 인위적인 가치)에 사로잡혀 억지로 자기 자신을 포기할 필요가 있을까? (적어도 울타리는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동정심과 같은 직감적 근거(목적)가 없다면, 무엇으로 도덕을 정의할 수 있을까?
가족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들이 살해당해도 딱히 슬프거나 분노하지 않는 듯이, 감정의 에너지가 없으면 사람은 사람답게 생각할 이유가 없어진다.
도덕 법칙 설정의 근거는 인간의 솔직한 감성이다. 어떤 규범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신념이, 혹시라도 비인간적이고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전통이 아닌지 비판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2022 06 17 ex. 수염을 길게 늘인 어떤 선비가 있었다.
그는 유교적 도의를 지키며 평생을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혼인하지 않은 두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일은 분명 역겨운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를 어떤 여자가 좋아해주겠는가?
그렇게 그는 결국 평생을 외로운 홀몸으로 살다 죽고 말았다...
그의 본성은 언제나 여자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지키는 전통적 규범은 그것과 거리가 멀었다.]
m@
절대다수의 가치관(전통)이 과연 마땅한 ‘선’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같은 우주를 두고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므로, 절대적인 선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다수의 합의로 채택된 잠정적인 선은 존재할 수 있는데, 내가 언급한 ‘선’의 기준이란 그것이다.)
사이비 종교에 심취한 사람들만이 있는 세상을 상정해보자. (전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그들의 규범에는 어떠한 실체적 목적(신을 믿고 따름으로써 찾아오는 정신적 쾌락 이외의 쾌락)도, 실질적인 의미도 거의 없다.
그들의 인간성은 그들이 믿는 종교 ㅡ 그들의 가치관 ㅡ 으로 인해 억압된다.
그들은 그들이 만든 규범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런데 이러한 규범에 대다수가 동의한다고 해서,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느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데 말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을 초월하는 어떤 목표가 있다고 망상하는 게, 도대체가 그게 지금 당장 어떤 의미가 있는가?
(천국과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후세계란 완전한 감각의 소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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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종교란 일종의 도덕규범이다.
내 생각에 그것은 인간성에 근거했을 때 옳다.
만약 사람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말하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잘못되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비인간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성적 욕구를 억제하라고 말하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잘못되었다.
@그것은 비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종교를 믿는 것은 너의 자유다.
그러나 나는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인간다움에 근거하며 산다면, 우리는 종교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충분히 올바르게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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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예상되는 미래에 웃고 예상되는 미래에 운다는 것이다.
m@
가치관-문화-규범-약속은 천부적인 인간다움에 근거해야 한다.
인간에겐 정신적인 행복 밖의 가치(e.g. 육체적 쾌락)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신적 만족감을 어디서 얻는지(인위적인 가치관)는 내 삶의 지침이 된다.
지침을 따랐을 때 사람은 정신적 만족감을 얻으면서, 부가적인 결과가 초래된다.
지침을 따라서 정신적인 행복을 얻음과 동시에 그것의 부가적인 결과가 내 다른 천부적인 쾌락에도 기여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비유하자면,
좋아하고 재미있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
좋아하고 재미있는 일을 하면서 돈을 못 버는 것보다는 더 낫다는 얘기다.
돈을 못 버는 일을 재미있게 하기보다는
돈을 잘 버는 일을 재밌게 하는 것이 더 낫다는 얘기다.)
[돈을 많이 벌어서 기쁜 것은 정당하다.
많은 돈은 내 쾌락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
신성한 목적을 맹목적으로 따라서 기쁜 것은 정당하지 않다.
실체 없는 그것을 따른다고 해서 내 인생이 실제 더 나아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 자식이 잘 되서 기쁜 것은 정당하다. (이는 순수하게 정신적인 기쁨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천성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학살하며 정신적 만족감을 얻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사람을 학살하는 건 비인간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
부당한 일을 겪었을 때, 끓어오르는 감정을 따르는 건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철학자들과 나는 근본적인 세계관이 다르니까, 조금씩 다른 주장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모두 비슷한 직감을 가진 인간으로서 추구하는 행위는 대개 비슷한 편이지만, 행위의 정당성에 대한 근거가 완전히 다른 경우가 많다.
수많은 철학자들은 본인이 직감적으로 좋아하는 것에 그럴듯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합리적인 인간은 존엄하다'는 식의 실체 없는 신성불가침적 가치를 근거로 불변의 절대적 법칙을 설정하곤 한다.[그저 그 직감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하면 되는건데...]그러나 수많은 해석주체에게는 각각 나름의 개성(취향)과 입장이 있는데, 획일화된 규범의 강제는 과연 타당할까? 딱딱한 억지 규칙은, 의미 부여의 유일한 근거인 개체의 감정적 입장과 조금씩 어긋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것은 인간을 위한 철학이라기보단, 철학을 위한 철학에 가깝다.[물론 사회적인 합의(협력)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개인)을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규범의 교조화는, 자유로운 인간을 주체성을 상실한 노예로 전락시킨다. 인간은 철학의 주인이 되어야지, 철학의 노예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규범은 세상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지는 비절대적 수단이다. 따라서 우리는 규범을 존중하되, 신성시해선 안 된다.]
사람들마다 입맛이 다르듯이 도덕적 직감은 조금씩 다르다.그렇기에 절대적 도덕 원칙은 존재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직감을 평균적인 하나의 기준으로 통일하여 약속한 것이 윤리규범이고, 이 약속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수있다.
(공리주의, 의무론과 같은) 윤리란 하나의 패러다임이다.
무엇이 인간의 감성에 더욱 부합하는지에 따라 이것(패러다임)은 끊임없이 교체되고... 교체될 수밖에 없기도 하다. (인류 유전자의 변동성과 다양성 때문에)
따라서 나는 제시한다 : 그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나 자신을 인정하자는 것을
사람이 먼저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먼저인데, 굳이 국어사전을 뒤져가며 이젠 죽어버린 불필요한 단어를 억지로 부활시킬 필요가 있을까?
국어사전은 절대로 완벽할 수 없다.
언어란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그리고 단어의 의미는 모두에게 조금씩 다르기에, 설령 뜻이 정의내려진 단어라고 해서, 그 단어가 영원히 그 뜻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법이다. 단어의 의미는 언제나 인간이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20210713.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사전이 중심이 아닌 인간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2021. 9. 8. 사회적으로 합의가 된 내용이 국어사전에 등재되는 것이므로, 국어사전을 무시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국어사전이 그 자체로 우리를 구속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2022 05 12 ex. 국어사전에 구애받지 않는 신조어의 등장)] [20211130 국어사전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인간이 먼저였다.] [2022 05 12 인간이 가장 먼저라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규범의 절대성은 인정될 수 없을 것이다.]
개인의 감정적 입장만을 가치 판단의 근거로 삼을 때(2022 01 11 정말 안타깝지만 그 밖의 신성한 의미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망상에 불과하다. 예컨대 우리는 개인의 감정적 입장 밖에 있는 유전자 보존에 무관심하다. 유전자 보존은 독립적인 신성함? 개뿔, 그저 입장이 유발한 현실대로 흘러가며 수동적으로 발생했을 뿐이다. 새끼를 낳기 위해 교미를 했던 것이 아니라, 좋아서 교미를 하고 보니 새끼가 생겼던 것이다.), 모든 개인에게 평균적으로 옳은 편인 도덕 원칙은 존재할 수 있어도 모든 개인에게 언제나 절대적인 우위를 지닌 도덕 원칙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예외로 개인에 국한된 진리는 존재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의미 있는 행동이 재화를 생산해내는 것(신성한 의미를 추구하는 것. 아마도 재화라는 표현은 조금 잘못된 것 같다. 20211122)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재화의 목적은 쾌락이다.
아무런 식량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게임(물론 그러한 체험으로 다양한 발상을 얻는 등 사소하고 다양한 가치를 고려한다면 만들어지는 게 아예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은 그것을 제외하고 생각하자.)이 의미 있는 이유는 게임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번식을 하지 못하는 자위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면,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꼭 유전자를 오래 보존할 수 있어야만 옳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자멸하는 길을 선택하더라도, 그것이 행복하다면 옳은 선택이다. 일반적으로 생존하는 유전자가 남았을 뿐(2021. 9. 6. 일반적인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유전자를 남기도록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유전자만이 우주에 남아오던 것 뿐이다. 특수한 상황이나 미래에는 멸종하게 될 행동이 즐거운 기분을 위한 것이라면 나는 괜찮다.), 물질일 뿐인 유전자에 신성한 의미는 없고 따라서 생명이 살아갈 우주에는 정답이 없다. 생존에서 도태된 유전자가 패배자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우리의 세상은 개인적인 착각 안에만 갇혀 있다. 그 바깥의 (2021. 11. 1. 신성한) 의미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왜 살아야하는가? 그것은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죽기 싫어서 살기 때문이다. 살아서 얻을 쾌락이 많기 때문이다. 현실 어디에도 내가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규칙은 없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마도 생명 뿐인데 개인의 착각 밖의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무의미해 보이는 행동도 행복한 기분을 준다면 유의미하다. 쾌락은 주지만 유전자 보존을 목적하는 시각에서 무의미해보이는 행동이더라도 우리는 근본적으로 유전자 보존을 목적(신성한 의미를 목적20211115)으로 삼지 않기에, 즉 쾌락을 목적으로 삼기에 그 행동은 유의미하다. / 예를 들어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것이 가능함에도, 그것이 섹스처럼 유전자 보존에 도움이 됨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실행했을 때 우리는 유의미한 수준의 쾌락을 얻지 못한다. 우리는 개인의 입장 밖에 있는 유전자 보존에 무관심했다.]
게임이나 음악 등 현실적인 재화를 만들어내지는 못하는 일도 그걸 하는 게 행복하다면 정당하므로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현실이 여유롭지 않아, 현실적인 일을 하지 않았을 때 얻을 앞으로의 고통을 고려해야한다면 당연히 게임은 접어두는 것이 합리적이다. [쾌락을 위해서라면 비현실적인 일도 현실적인 일도 모두 수단이 될 수 있다.20211121]
인생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이런 것을 잊기 위해선, 착각에 깊이 빠져 살아갈 수밖에 없다. [2021. 10. 19. 그렇다면 (미래에 대한 걱정 없는 현실 속, 혹은 미래가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다시 말해 인간의 현실적인 노력이 무의미한 상황에서20211122) (부작용 없는)마약으로 살아가는 것은 옳은 게 된다. 인간의 존엄성을 잃는 것 같기도 하고 좀 거부감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타인으로서 이는 개인의 입장이 아니다. (예를 들어 권력자들의 더러운 향락과 사치에 대해 '타인'인 우리는 역겨움을 느끼지만, 막상 내가 그들과 같은 환경에 놓인다면 그 땐 그 더러운 것들을 '개인'으로서 신나게 즐기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20211122)]
[인공지능이 모든 일을 대체하게 된다면, 인간은 인생을 즐기는데에만 집중하며 살 것이다. 편안해진 상태로 긴 시간동안 진화를 받아들이다보면 많은 시간이 흐르고 우리와 전혀 다른 다양한 형태의 기형아가 번성할 것인데, 그것을 억지로 막아 현재의 인간과 같은 유전자를 유지하는 것 또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렇게 불편한 일이 많이 일어날 것이다. 어떤 방도가 없다. 따라서 나는 먼 후손을 잊고 나만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가 어떤 일을 하든 종교적인 의미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수컷 사마귀는 교미 시 암컷 사마귀에게 잡아먹힐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불사하고) 번식을 선택한다. 이는 생명의 목적이 생존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사례 중 하나이다. 어떠한 목적도 없이, 방법이 어떻든 유전자가 남아오던 것이 그저 남아오던 것이었고, 그런 이유에서 생존을 추구하는 게 생명의 일반적인 모습이 된 것 뿐이다. 이것이 근본적인 목적이라고는 볼 수 없다.
나를 포함한 모든 생명들은 오로지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며 살 뿐이다. 사명감 따위는 없다.
[2021. 9. 6. 마찬가지로 우주 속의 물질일 뿐인 생명에 유전자를 남겨야만 한다는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전자를 남겨야만 한다는 착각(욕구)을 불러일으키는 유전자만이 우주에 남아오던 것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 유전자의 번영을 바라기보단 나의 기쁨을 바라자.]
다마고치 등 디지털상의 애완동물은 생명이 아니니까, 키우던 그것이 죽어서 누군가 운다면 당신은 그에게 그것은 허상일 뿐이라며 한숨을 내쉴지도 모르겠지만, 본질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결코 허상 따위로 취급될 수 없다. 인간적인 관점을 포기하면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허상(동등한 지위의 소립자)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의 의미는 오로지 개인의 관점에서만 규정되는 것;
그래서 생명이 아닌 애완동물이 애완동물로 여겨질 수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이라는 것이다. 현실이 어떻든 의미는 인간이 부여하는 것인데, 애완동물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든지 간에 그것이 인간의 애정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애완동물로 역할할 수 있다. (동물이 아니라는 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능하다)
m
삶에 집착하지 않으면, 사는 의미가 없어진다.
꿈을 꾸고, 계속하여 더 나은 것을 바라지 않으면, 사는 게 재미가 없어진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의 눈으로, 사람다운 환상을 본다면, 그 환상에 빠져 살아야지, 왜 불교는 그러한 현상을 부정하고 거부하는가?
내 눈에 강아지는 귀엽다. 쓰다듬어주고싶다. 근데, 그것은 나의 관점을 벗어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은 공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강아지를 귀여워하면 안 되는건가?
게임은 재미있다. 점수를 쌓는 것이 재미있다. 근데, 그것은 데이터 쪼가리일 뿐,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게임을 즐기는 게 잘못된 걸까?
우주에는 @객관적-절대적인 미(선악 판단)의 기준이 없지만, 우리의 주관은 사물에 아름다움을 부여할 수 있다. 거대한 우주에 압도되어 자신 주변의 조그마한 가족과 이웃이 무의미하다며 한탄하지 말자. 의미의 원천은 신도, 사회도 아닌 바로 '나'의 주관이다.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이다.
결국은 이 우주에서... 모든 게 찰나에 불과하고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조그마한 게임에 정성을 다하는 게 본질적으로 내 인생에 힘쓰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본다.
인간이란 원래, 당장 내 눈에 보이는 것만 아름답다면 됐지, 그 이면에는 무관심하다.
내가 보는 영화가 아무리 허구라고 해도, 이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메마른 사람이 어디 있을까?
반박 :
마기꾼의 실제 얼굴을 보고 나면, 그 사람을 처음처럼 연모할 수 있을까?
이전까지는 본모습이 어떻든 겉모습만 보기 좋으면 좋은 것이라고 외면했었는데, 생각하는 인간 그러한 인간으로서 실상을 외면하는 건 인간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습하는 사념을 도저히 내칠 수가 없더라.
그러므로, 징그러운 벌레에게도 쾌고감수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그것을 함부로 밟아죽일 수 있을까?
내가 먹는 고기 반찬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잔인한 도축의 과정이 있었는지를 알면, 감히 고기를 함부로 남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적어도 사람이라면, 고기를 감사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깨끗이 먹을 것이다.
디지털 강아지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딱딱한 기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도 디지털 강아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삶과 죽음은 동일하다. 생물과 무생물은 구별되지 않는다.
자유의지가 없는 인간 또한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인지라, 어떻게 보면 인간의 환경 파괴는 환경 파괴로 보기 어렵다.
우리의 환경 보호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환경에 대한 보호이다. 환경을 위한다는 것도 결국 인간을 위한 것이다. 인간의 해석을 벗어나, 필요도 없는데 굳이 모든 공간이 억지 주장에 의한 신성한 숲으로 유지될 필요는 없다.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들은 자연 발생적이다. 따라서 엄밀하게는 인간(인간이 지은 건물 등)을 포함한 모든 것이 자연(동등한 지위의 소립자)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연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고 말하는 '아름다운 자연'이란 뭘까?
애초부터 우리가 말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이란, 인간 관점에서 정의 내려진 인간중심적 가치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자연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자연을 존중하지 않았을 때, 지구온난화 등으로 우리가 피해를 보게 될 수 있어서.
귀여운 동물을 괴롭히는 건, 아름다운 자연을 콘크리트로 메워 버리는 건 그 자체로 인간의 감성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자식들이, 후손들이 살아갈 미래 환경을 생각하는 건 인간의 천성이다.
인간의 천성적인 직관(해석)에 따르면
돌멩이, 세균 : 매우 안 중요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음.)
모기, 식물 : 안 중요
강아지(포유류) : 중요
인간 : 매우 중요 (심지어 인간들끼리도, 가치가 다르다. 잘생긴 사람이 못생긴 사람보다 존엄하게 느껴진다. 나와 가까운 사람이, 나와 안 친한 사람보다 더 존엄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느껴지는대로 살면 된다.
자기 자신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
개체의 주관만이 의미부여의 유일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내 주장 중 오류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인간의 천성이 어떤 것이다‘ 내 마음대로 단정하는 부분이다.
[인간의 천성을 명확하게 규명하는 데에는 과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생략했다.]
1. 목적과 수단
내가 말하는 목적이란, 당신이 추구하는 결과이다. 내가 말하는 수단이란, 당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할 방법이다.
수단의 목적 달성 정도는 해당 목적에 대한 수단 합리성의 판단 근거이다. 따라서 수단은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인 목적에 부합하여야 한다.
1.1. 수단 가치 평가의 친근한 예시
학생들의 공부를 위해 선생이 숙제를 주문하고 결과물을 받아내는 상황 속에서, 어떤 학생들은 숙제가 제시하는 문제는 풀어보려고도 하지 않은 채 답안지를 베껴가며 숙제를 완성하기도 한다. 이는 그저 선생이 다루는 평가 기준만 맞추어도 점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이 선생에게서 주문받은 대로 숙제를 완성하여 제출하였을지라도, 당연히 이렇게 비겁한 숙제 제출이 공부라는 기존의 근본적인 목적에 부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비근본적 수단은 그것의 목적에 대해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2. 목적 분석
어떠한 목적을 지닌 수단과 마찬가지로 목적 또한 그 속에 목적을 지닌 하나의 수단이다.
어떠한 수단이 어떠한 목적에 어긋날 수 있듯이 목적이라는 수단 자체가 제대로 된 수단이 아닐 수 있기 때문에, 단순히 어떠한 목적을 달성한다고만 해서 무조건적으로 현실에 긍정적인 효과를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목적의 가치를 분석하고, 때에 따라서는 목적을 재정립할 필요성이 존재한다.
덧붙여 우리가 솔직하게 현실을 인정한 채 가치를 분석할 수 있다면, 때론 고상하게 욕구를 절제하거나, 이제는 형식만이 남아 비효율적인 과거의 풍습에서 벗어나는 등, 의미 있는 집념을 찾아 가장 사람다워질 수 있을 것이다.
2.1. 목적 분석의 예시
A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에 화재가 발생하였음을 발견하였다. 이미 불은 번질 대로 번진 듯 보였고, 시간을 더 지체하다간 A 자신 뿐만 아니라 A의 이웃들까지 모두 통구이가 될 게 뻔했다. 당연히 A는 그러한 재앙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생각했기에, 소방서에 화재를 신고하여 아파트의 화재 피해를 감소시켰다.
만약 A가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더라면, 사람이 죽는 가슴 아픈 참사가 일어났을지도, A의 주거지에까지 불이 번지며 당장 A가 살 공간이 망가졌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깊게 말해 이는 A의 삶의 질 저하와 직결되는 것이었다.
정리하자면 A가 화재에 대해 소방서에 도움을 요청하는 수단은 화재 진압이라는 목적에 부합하였고, 그 목적인 화재 진압의 가치는 A 이웃들의 생명과 주거지의 보호 등이었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목적 분석은 간단하다.
다만 우리는 어떠한 목적으로부터 가지처럼 뻗는 다양한 가치들을 알아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참고하며 목적을 평가하여 상황에 따라서는 더 나은 목적을 새로 정할 수 있어야 한다. 앞선 예시는 합리적인 목적을 다루었지만, 세상에는 이와 같이 합리적인 목적만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3. 인간으로서의 궁극 목적
목적을 끝까지 분석해보았을 때, 우리는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근본적인 목적, 즉 궁극 목적이란 결국 인간 자신만의 쾌락이더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당연하게도 이는 수단 합리성의 가장 근본적인 판단 근거이다.
3.1. 인간의 세상
인간은 물질로 환원된다. 그러한 면에서 인간이란, 사실 기계와 같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물질에는 그 바깥의 어떠한 신성함이나 원칙 같은 것이 애초에 없다는 말이다. 세상은 존재하는 것들로만 흘러가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세상이란, 결국 인간 자신의 감각이다.
인간은 자연 선택된 존재로서, 배고프면 밥을 먹고, 이성을 사랑하고, 친구와 웃고, 미운 사람은 괴롭히고, 아픈 걸 싫어하는 등 긴 시간 동안 정교히 설계된 감각으로부터의 다양한 만족을 추구하는 세상을 따름으로써 보통 생존한다. 그러한 면에서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두려워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인간은, 특히 현명한 인간은, 자신의 궁극 목적을 위해 고차원적인 수단을 쓰는 경향이 짙다.
3.2. 궁극 목적에 의한 사회 계약
윤리 등 우리가 흔히 신성하다 여기는 것들 또한, 결국은 인간의 만족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인권의 가치는 인간으로서 느끼는 연민으로부터의 욕구 충족과, 인간 모두를 존중하는 사회 계약으로서 여러 개인들의 만족에 기여하고 있다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궁극 목적과의 연결 없이 독립적으로 가치를 증명하는 신성한 원칙이 될 수 없다. 우리는 현실을 인정하고, 실재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누군가 동물을(특히 포유류를) 학대하면 그것이 나쁘다고 질책한다.이는 동물이 그 자체로 신성하고 존엄해서라기보단
(혹은 동물에게 쾌고감수능력이 있어서라기보단), 인간 대부분의 눈에 동물은 제법 귀엽고 소중한 존재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다른 동물들 또한 웃고, 울고, 사랑하며, 고통스러워한다. 그래서 공감하게 되는 것 같다.]
같은 것을 보고도, 해석은 다를 수 있다. 절대적인 의미를 가진 존재는 어디에도 없고, 따라서 생명이 그 자체로 신성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소수의 독특한 사람들은 동물을 혐오하고, 그래서 동물 학대를 옹호할지도 모른다. 개인의 세상(개체의 독자적인 관점만이 의미 부여의 유일한 근거인 세상), 그렇다면 그들은 그저 자기 나름대로 좋아하는 일(동물 학대)을 하며 살아가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동물을 사랑하는 우리 사회의 규범에 복종해야 한다. 소수자는 다수자를 이길 힘이 없다. (물론 소수의 힘이 더 강력하다면 다수의 입장은 묵살될 수 있다. 개미굴을 부수지 말아달라는 수많은 개미들의 절규는 그 위에 건물을 올리려는 강력한 소수의 인간들에게 철저히 무시 당한다.) 누구든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자기 고집만 부리다가는, 분명 엄청난 시련(동물 학대로 얻을 쾌락보다 큰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늘 자신의 입장에 어긋나는 사악한 존재를 사무치게 미워했고, 철저히 제거해왔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러한 소수자들은 본디 사람이 아니라 악마였을 뿐이다.
[한편으로 그 소수자가 나 혹은 나와 가까운 사람이 되었을 때를 우려하여 / 소수자에 대한 동정심에 의해 소수자를 우대하는 규칙을 마련할 수도 있다. 나는 하루아침에 사고로 장애인이 될 수 있다.]
만약 동물을 학대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회 구성원 대다수를 차지하게 된다면,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기존의 규범 역시 그들의 요구에 따라 교체될 것이다. (물론 내 개인적이고 특이한 취향의 추구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내지 거부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면, 소수의 입장이라도 관철될 수 있다.)
물론 내가 이기적인 입장으로부터의 일률적인 평등 내지 전쟁 상태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투쟁이 혈투로 변질되어 사회 전체에 과도한 손해를 낳는다면, 마찬가지로 개인의 삶 또한 괴로워질 것이다. 척도는 개인에 있다. 즉 사람들과 공생하고 협력하는 이타적인 삶이 오히려 개인의 장기적인 번영을 가져오는 수단이 될 수 있다. ~하듯이{사례추가하기}, 우리는 함께할 때 더 강하다. 이렇게 이타주의는 개인의 입장에 부합할 때 정당화된다. 개인의 행복을 위해, 이타적인 행동은 필수적이다.]
[2022 01 14 평등하지 않아도 괜찮다. 남들이 불행하더라도 내가 그게 좋다면 그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천성적으로 불평등에 분노한다. 짧은 쾌락에 양심적 쾌락을 잊은 당신은 인간이 맞나?]
인간은 본디 사회적 동물이라 본성적으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갈 때 행복하다.
사람들과 공생하고 협력하는 이타적인 삶이 당장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일지 몰라도, 이것은 오히려 개인의 장기적인 번영을 가져온다.
다양한 취향을 가진 개인의 세상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공공적인 일은 뒤로한 채 자신만의 입장을 내세운다면, 사회적으로 엄청난 혼란이 발생할 것이고, 이는 개인의 고통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서로 양보하며 살아야 한다. 같이의 가치를 아는 우리들은, 평균적으로 옳은 원칙(규범)을 합의하여 정해두고 살아간다.
다양한 취향을 가진 개인의 세상이다. 그러나 모두가 자신만의 입장을 내세우며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세상에 혼란이 올 것이다. 반면 함께 협동하며 사는 것은 강력하다. 그래서 서로 양보하며 살아야 한다. 같이의 가치를 아는 우리들은, 평균적으로 옳은 원칙을 합의하여 정해두고 살아간다.
m@
나는 줄곧 사람들에게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개가 되라고, 개처럼 가식 없이 살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마냥 자연스럽기만 한 짐승 같은 삶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이성적인 인간은 단견적인 충동을 인내/억제하는 인위적인 준칙을 따름으로써, 장기적인 측면에서 더욱 인간답게 행복할 수 있도록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능력 또한 인간다움의 핵심이라고 본다.
(@@@우리는 감정적 에너지를 분출하기 전, 이러한 분출이 더 중요하고 거대할 감정, 혹은 다른 경로의 만족이라는 합리적 목적에 어느정도 부합(혹은 위배)하는지 점검하며 장기적인 만족의 정도(순간적 만족의 정도 뿐만 아니라 만족의 길이 또한 이에 포함될 것이라 예상한다.)비중에 따라 저울질하여 행동해야 한다.)]
m@
도덕적인 사람들은 장기적인 이익을 볼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인 경우가 많고,
비도덕적인 사람들은, 단기적인 이익에 눈이 멀어버린 멍청한 짐승인 경우가 많다.
본능은 현재까지 일반적으로 생존을 만들어냈기에 존재하는 유전자에 의한 것에 불과하다. 변수나 변화에 대처하지 못할 때도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본능에 왜곡되어 누락되는 현실의 정보를 활용하지 못하게 되는데, 우리는 인간의 이상이 아닌 인간에게 무관심한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당연히 이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m@
직감에 따르면 설탕(마약)은 달콤하다. (이는 영양소가 부족했던 과거 상황을 떠올려보면 어느 정도 합리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먹을것이 풍족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의 변화 속도에 비해, 유전자의 변화는 너무 늦다.)
그러나 설탕(마약)을 많이 먹으면 건강에 좋지 않고, 이는 삶의 질 저하로 이어진다.
현실과 직감 간의 괴리를 나타내는 이 사례는 인간의 도덕적 행위에는 직감 뿐만 아니라 이성적 가치 판단 능력도 필요함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이는 여전히 주정주의적이다. 당장의 충동을 억누르는 것은 미래에 더 큰 쾌락을 누리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직감은 정말로 소중한 것이다. 상한 음식을 먹었을 때 ‘맛없다’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면 인간은 진즉에 배탈나서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장기적인 쾌락을 고려하여 자신의 감정을 절제할 줄도 알아야 한다. 절제하지 못하는 건 짐승이지 인간이 아니다.]
사회의 규범을 따를 것을 권유하는 내가 어떤 행위의 가치를 고정적인 것으로 취급하며 신격화하고있다고 오해받을지도 모르겠지만, 인간의 입장에 개인적인 감각 이외의 고려 요소는 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언제나 결과로서 행위의 가치를 평가한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변수가 넘쳐나는 복잡한 세상에서 일반적인 결과에 근거하여 그나마 성공할 확률이 높은 행위를 추구하는 것일 뿐; 일반적인 결과에 변화의 바람이 분다면, 혹은 결과와 관련된 모든 변수를 파악하고 고려할 수 있다면, 그에 맞춰 원칙도 변화하거나 세분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늙은 고집에서 탈피하여 더욱 실용적인 능력을 얻고자 노력해야한다. (2021. 9. 30.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수단의 예시로, 법은 변화하는 사회에 맞추어 일반적으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수정된다.)]
m@
주관적인 감각으로 우주를 해석한다. (우주에 의미를 부여한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이 작은 우주(소립자 뭉치)를 시각으로, 촉각으로, 후각으로, 미각으로 해석했다.
이건 내가 느끼기에... ‘햄버거’야!
@분리된 해석주체에 넣을 거 있나 확인
내 느낌 밖 의미는 없다.유일한 의미인 내 입장을 거역해야 할 이유가 없다.개인의 감정적 입장을 벗어나 희생해야 할 이유가 없다.[내가 원한다면 '나'조차도 버릴 수 있다.][2022 02 14 나의 사랑이 사랑의 대상에게 무조건 이득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답하겠다. 사랑은 내 정신적인 만족감을 위한 형식에 불과할 뿐, 그 대상을 위한 사랑이 아니다. 나의 사랑은 던져져서 그 대상을 향해 날아갈 뿐, 사랑이 스스로 대상을 찾아가지는 않는다. 따라서 약간의 괴리가 있을 수 있다. 나는 사람을 사랑하되 위하지는 않는다. 내가 꽃을 선물해주더라도, 그대는 꽃보단 돈이 필요할 수 있다. / 내게 있어서 돼지는 배고픈만큼 소중하고, 사람은 사랑하는만큼 소중하다.]내가 느끼지 못하는 것은 모두 무의미하다.나와 분리된 다른 생명의 감정적 입장.그 자체로 고귀한 생명은 없다. 내가 살아갈 자연이다. [개체는 독자적으로 물질을 해석하여, 그것에 나름의 의미와 지위를 부여한다.]
개체의 느낌(생명의 망상, 착각)만이 우주 속 차등적 의미(지위) 부여의 유일한 근거이다.
다시 말해 개체의 느낌을 벗어난 신성한 의미는 없다.
감각 제외를 전제하면, 모든 것은 동등한 지위의 물질일 뿐이기 때문이다.그렇다면 도덕적인 것, 부도덕한 것을 무슨 근거로 나눌 수 있겠는가? 정답은 유동적이고 개성적이고 개별적인 개체에 있다. 가장 먼저 나에게 있고, 그러나 너에게도 있고, 따라서 우리에게 있다.
@또한 결코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우울감은 의외로 물리적인 변화만으로 극복되곤 한다. 산으로 올라가 좋은 공기를 맡을 수도, 일단 잠을 자고 볼 수도, 우울증 약을 처방 받을 수도; 몸을 건강하게 한다면 나쁜 생각은 마법처럼 사라진다.
실상은 돌과 다를 바 없는 생명, 이 또한 인간만의 입장에서만 가치 있게 인식되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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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의 역설
벤자민 리벳 실험
테세우스의 배
낙관적 허무주의 (Kurzgesagt – In a Nutshell) (https://youtu.be/MBRqu0YOH14)
미국 독립선언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A%B5%AD_%EB%8F%85%EB%A6%BD%EC%84%A0%EC%96%B8)
[기타 설명]@
이 글은 내가 고2~고3때 쓴 ‘칸트주의 비판’이라는 바보같은 글에서 파생된 주제 중 하나이다. 영어학원에서 멍때리고 딴생각하면서, 이 글을 구상했다.
글 제작에 걸린 시간: 고3 후반기~대학교 ?학년
내가 고3 때, 김상배 교수님은 내 글에 들어가는 용어의 쓰임이 부적절하며,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상대방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을 논파해야 한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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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을 반드시 제시해야 함 / 참고문헌이 꼭 논문일 필요는 없음. 뉴스기사도 가능하다./ 한국어로 된 자료는 1/5 정도만 넣고 나머지는 영어 자료를 조사하자
배움 폴더에 '참고문헌' 폴더가 있음.
"칸트주의 비판" 참고하기 https://unfurl.tistory.com/352
감각적인 현상을 초월한 불변의 진리가 정말 존재할까? 장소를 불문하고, 시대를 불문하고, 전 우주에서 두루 통하는 진리 말이다. 불변의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과학, 수학이다. 수학을 예로 들어, 1+1=2와 같은 논리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적용되는 진리이다. 과학을 예로 들어, 수소 원자가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전 우주에 통하는 진리이다.
[1+1=2와 같이,
절대적인 진리는 있을지 몰라도,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수단)는 없다.]
[한편으로... 통일성이 편의성을 증진할 수도 있지 않을까?
가령 과학이나, 수학 같은 데서 말이다.]
[가치를 다루는 학문이 아닌,
변치 않는 진리를 다루는 학문에서 통일성은 유용하다!)
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수단(규범)이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 어떤 규범이 사회 안정에 도움이 되는지, 이에 대한 의견들은 장소에 따라, 분야에 따라, 시기에 따라 그 효과가 달라진다. 환경은 변화하고, 그에 따라 수단의 가치도 변화한다. 결코 완벽한 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문학에서만큼은, 절대적인 삶의 지침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모든 개인은 나름의 취향이 있고, 개성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과 같은 획일화된 규범을 강제하면 인간성은 심각하게 침해받게 된다.
다양한 관점을 존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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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누군가가 행위하려는 과정에서 어떠한 수단이 근본적 목적에 부합한다고 정의, 빠른 사고를 도와줄 수 있다. 누군가의 현명할 지 모르는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나름 현명한 의견은 언제든 반박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론의 가치를 신성화시키는 게 아닌, 귀를 열어 더 근본적 목적에 부합한 이론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것이 효율적이지 않겠는가. 시대는 계속 변하기에 어떠한 지혜는 기존의 수많은 조건이 변화하기에 따라서 지혜의 근거가 무너지고, 현실에 적용되지 못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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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수단도 쓰이는 곳에 따라 가치가 변한다.
도끼를 나무를 베는 데 쓰는 것은 적절하지만,
도끼를 초밥을 만드는 데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
구석기시대 돌멩이는 전쟁에서 강력한 무기이지만,
현대에서 돌멩이는 총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일반적인 아이를 양육, 교육하는 방식과
문건서라는 아이를 양육, 교육하는 방식은 달라야 한다.
다른 아이를 키우는 방식 그대로 문건서를 키우면, 좋은 효과를 얻기 어렵다.
[각기 다른 상황마다, 그것에 부합하는 최적의 수단을 골라 이용해야 한다.
결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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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수단(행위)이라는 말은, 승리를 목적하는 간단한 게임 같은 세상이 아닌, (만족을 근본적 목적으로 두는 인간으로서의) 현실 속에선 너무나 추상적인 듯 하다. 그러한 현실에선 게임 속에서의 단순한 목적과 달리, 그 근본에서 최고의 결과(목적)가 무엇(어떤 형태의 만족)으로 딱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옳다 정의된 하나의 수단이 각기 다른 상황 속, 그 아주아주 약간의 조건에 따라 목적 부합 여부(정도)가 재결정될 수 있지 않는가? 완벽한 의견(수단)은 존재할 수 없다. 설령 엄청난 지능을 가지게 된 인공지능일지라도... 아마 나의 만족에 있어 완벽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완벽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기존의 수단보다 더 나은 수단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수단을 만들기 위해선, 수단의 합리성(목적 부합 정도)에 관한 다양한 입장과 의견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어떤 필통을 사용하는 사용자가 느끼는 필통의 모습과, 그 필통을 옆에서 훑어보는 구경꾼이 느끼는 필통의 모습은 다르다. 따라서 사용자가 필통의 효율성을 따지기 쉬운 반면, 구경꾼은 필통의 외모를 중심으로 필통을 평가하기 쉽다. 이는 수단의 특정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기 좋은 다양한 위치(입장)가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 하나의 시각은 어떠한 상황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예를 들어, 어떤 필통의 사용자 여럿이 필통에게 느끼는 공통된 문제점에 대해서, 이들이 각각 제시하는 필통의 개선 방향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어떤 사용자는 잘 더러워지는 필통에 코팅이 필요하다 주장할 수 있고, 어떤 사용자는 더러워보이기 쉬운 필통의 색깔을 어둡게 바꾸자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수단에 대한 다양한 이들의 생각들을 적절히 다룬다면 어떠한 목적에 더욱 더 강력한 수단이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다.
[2021. 11. 2. 사람들마다 다양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다양한 입장의 배경이 된다.]
[2022 09 06 스스로 무엇이 부족한지를 모르는 사람은, 더이상 발전할 수 없다. 그래서 비판을 기분 나쁘게 받아들여선 안 된다. 기존의 수단과 새로운 주장을 적절히 조합하면 더 나은 수단을 만들어낼 수 있다. (변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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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이 중심이 아닌 인간이 중심이다.
사회적으로 합의가 된 내용이 국어사전에 등재되는 것이므로, 국어사전을 무시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지만 국어사전이 그 자체로 우리를 구속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ex. 국어사전에 구애받지 않는 신조어의 등장)
국어사전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인간이 먼저였다.
인간이 가장 먼저라는 점에서, 국어사전은 인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규범의 절대성은 인정될 수 없을 것이다.
m@
딱딱한 법(교조화된 규범)이 수천 가지 상황에 항상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긴 어려우며,
시대와 장소는 계속해서 변화하고,
법이라는 것도 결국 공익을 위한 일개 수단에 불과하다.
한두 장짜리 규정으로 모든 변수에 대응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엄격한 법 집행이 공익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 원칙에는 맞지 않더라도 이럴 때 만큼은 유도리 있게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원칙을 무시한 자의적인 법 집행의 부작용과 위험성은 매우 크다. 그러므로 융통성의 발휘는 정말정말 제한적으로, 절대다수의 요구(예를 들어 헌법)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m@
모든 규범에는 목적이 있다.
횡단보도를 빨간불일 때 건너면 안 된다.
이는 도로의 질서를 지키는 데 있어 합리적이다.
그러나 교통통제로 도로에 차가 안 다니는 상황이라면?
횡단보도를 빨간불일 때 건넌다고 해서 문제가 될 부분은 없을 것이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규범도 변화해야 한다.
규범이라는 것도 절대적인 선이 아닌, 공익을 위한 한낱 수단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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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결과에 변화의 바람이 분다면, 혹은 결과와 관련된 모든 변수를 파악하고 고려할 수 있다면, 그에 맞춰 원칙도 변화하거나 세분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늙은 고집에서 탈피하여 더욱 실용적인 능력을 얻고자 노력해야한다.) (2021. 9. 30.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수단의 예시로, 법은 변화하는 사회에 맞추어 일반적으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수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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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근본을 잃어서는 안 된다.
#예시로 좋은 글을 위해서라면 문법은 얼마든지 파괴될 수 있다. (글의 근본 목적은 전달이다. 문법이라는 것도 전달을 위한 수단인건데, 오히려 문법을 파괴함으로써 근본 목적에 더욱 부합할 수 있다면, 즉 더 나은 수단을 위해서라면 문법은 포기해도 괜찮다.)
[2022 02 05 거듭 강조하지만, 파괴가 문법을 시도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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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유행하는 자유, 인권, 민주주의 따위의 가치들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것은 신의 것(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닌 한낱 수단에 불과하다는 점; 우리에겐 언제나 더 나은 수단이 있을 수 있다는 여전히 열린 가능성이다.
[2022 01 17 자유도 궁극 목적(쾌락)에 대한 수단에 불과하다. 궁극 목적에는 가지가지 수단이 적용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자유를 빼앗김으로써 오히려 더 좋은 결과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ex. 구속적인 징병제가 없다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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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이 맹목적으로 고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규범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다. 여전히 열린 가능성이 있다. 원칙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지, 인간이 원칙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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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새 없이 꼼지락대는 우리 세상.
그 속에 과연 변하지 않는 '절대적 진리'라는 것이 존재할까?
그것은, 역설적으로, '모든 것은 변한다'는 무상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의 철학적 탐구가 무의미해지는걸까?
어쩌면 그 유동성(무한한 가능성)은,
오히려 우리에게 끊임없는 활력(도전 의식)을 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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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철학자들은 본인이 직감적으로 좋아하는 것에 그럴듯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인간은 존엄하다'는 식의 실체 없는 신성불가침적 가치를 근거로 불변의 절대적 법칙을 설정하곤 한다.[그저 그 직감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하면 되는건데...]그러나 수많은 해석주체에게는 각각 나름의 개성(취향)과 입장이 있는데, 획일화된 규범의 강제는 과연 타당할까? 딱딱한 억지 규칙은, 의미 부여의 유일한 근거인 개체의 감정적 입장과 조금씩 어긋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것은 인간을 위한 철학이라기보단, 철학을 위한 철학에 가까운 편이다.[물론 사회적인 합의(협력)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개인)을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규범의 교조화는, 자유로운 인간을 주체성을 상실한 노예로 전락시킨다. 인간은 철학의 주인이 되어야지, 철학의 노예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규범은 세상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지는 비절대적 수단이다. 따라서 우리는 규범을 존중하되, 신성시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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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자신만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
보편적인 철학은 보편적인 수단(참고 자료)일 뿐이지, 다양한 입장이 있는 모두에게 최선의 수단이라고 볼 수는 없다. (취향도, 처한 현실도 사람마다 다르므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나가게 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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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음식을 먹고도 배고픈 사람은 감사함을 느끼는 반면 배부른 사람은 거부감을 느낀다. 똑같은 벌레를 보고도 사람은 혐오감을 느끼는 반면 같은 벌레끼리는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또 사람한테는 더럽다는 것이, 파리에겐 깨끗할 수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과 추악한 것을 구분하는 건 오직 해석주체의 주관이지, 절대적인 의미는 없다.
똑같은 우주를 두고도, 각각의 해석주체마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다양하다. 의미는 고정되지 않는다. 신이 정해준 의미는 없다(=절대적인 의미는 없다). 다만 끊임없이 변화(개체의 진화와 순간적 변화를 모두 포함하는 의미에서 쓴 말이다. // 유전자의 다양성과 변동성)하는 신체의 욕구만을 따른다. 행복하기 위해선 이러한 각 해석주체의 차이, 취향(각 해석주체 고유의 해석 방식)를 존중하며 살아가야 한다.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에게 남자를 좋아하라고 강요할 순 없듯이,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에게 여자를 좋아하라고 강요할 순 없다. (개체들 간 이러한 입장차는 다툼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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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원칙이 맹목적으로 고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규범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다. 여전히 열린 가능성이 있다. 원칙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지, 인간이 원칙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국어사전 예시 추가
우리의 말로, 우리의 이야기를 담은, 젊은 시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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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람들과, 지금 사람들이 처한 상황은 다른 부분이 많고 그에 맞춰 언어도 변화한다.
고전 소설 등을 읽어보면,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을 제외한; 예를 들면 예나 지금이나 이성에 대한 사랑은 비슷할 것이다)그 시절 문화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공감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오래 전의 것을 싫은데도 억지로 감상하려하지는 않아도 된다. 오늘날의 훌륭한 것들을 즐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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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철학적 지식을 달달 외우는 것이 그 자체로 가치를 갖는다기보단,
이를 자신이 처한 상황에 응용-적용-참고하여 자기 생각을 갖추고 이를 실행에 옮겨야 @진정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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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것을 우리 식으로 재해석해야 한다. 우리 땅에 맞게 현지화해야 한다.
옛것을 우리 상황에 맞게 재조정해서 써야 한다.
다른 나라의 음식을 우리 입맛에 맞게끔 수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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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다양한 종교의 계율이 조금씩 다른 이유는, 각 지역들 간 사정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돼지를 사육하면 식량이 부족해지는 지역에선, 돼지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는 종교가 생겨났고(그것이 장기적인 측면에서 인간다운 행복을 주었기 때문이다.),
돼지를 사육해도 식량이 부족해지지 않는 지역에선, 맛있는 돼지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지 않는 종교가 생겨났다.(그것이 장기적인 측면에서 인간다운 행복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종교(윤리규범)라는 수단의 궁극 목적은 다수의 인간다운 행복이라는 점에서 ㅡ 끊임없는 환경의 변화에 의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수단은 없다는 점에서 ㅡ 규범의 교조화는 결코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 제각기 처한 상황이 다르고, 규범의 표준화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각 사람마다, 지역마다, 시기마다, 그에 최적화된(그곳만의, 그때그때 사정에 부합하는) 특수 윤리가 적용돼야 공리를 극대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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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철학은 도처에 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데카르트 같은 @서양철학 말고도
한국철학, 인도철학, 불교철학 등... 모든 지역에 고유의 철학이 있다.
[가장 지역적인 것을 세계적인 것으로...]
--@
철학은 하늘이 아닌, 땅에서 나온다.
일상 속에서, 일상이 담긴 장소에서, 장소가 담긴 시대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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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다른 지역, 다른 시대의 철학은 참고자료일 뿐이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자신이 처한 현시대에 적용할 수 있고,
자신이 속한 국가의 문제,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철학을 연구해야 한다.
한국인이라면, 한국스럽게 철학해야 한다.
그렇다고 보편적인 윤리규범은 없을까? 아니다. 모든 규범에는 교집합이 있기 마련이고, 이 교집합 ㅡ 보편적인 기준 ㅡ 에서 지나치게 멀어진 규범은 비인간적일 공산이 크다. 가령 사람을 죽여도 된다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잘못되었듯이...
우리는 어떠한 수단을 평가할 근거(보편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교집합을 찾아내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이를 위해 우리는 다양한 관점을 참고할 수 있어야 한다.
[@제설혼합주의: 세계를 한가지 각도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어떠한 현상의 단면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양한 주장, 다양한 관점으로 보아야 진리가 뭔지 우리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주사위를 보는 것과 같다.
주사위에 숫자 1이 적힌 면에 서 있는 사람에게 주사위란, 1이 적힌 정사각형일 것이다.
주사위에 숫자 6이 적힌 면에 서 있는 사람에게 주사위란, 6이 적힌 정사각형일 것이다.
이들의 다양한 관점들을 취합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정육면체 주사위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
m@
인권과 같은 보편적인 가치에 위배되는 규범은 옳지 않다.
규범의 다양성은 중요하지만,
일정한 규준 없이 무분별하게 다양한 규범이 난립하면 사회 질서가 무너진다.]
보편적인 기준이 있다면 무엇인가? 그건 바로 인간다움이다. (물론 엄밀하게 따졌을 때 인간다움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m@
지구상에는 다양한 언어가 있고,
각각의 언어마다 보여주는 고유의 세계가 있다.
--ChatGPT
수학과 과학에 대해서는, 당신이 제시한 것과 같이 1+1=2와 같은 수학적인 진리와 수소 원자의 성질과 같은 과학적인 진리는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유효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는 인간의 관찰과 추론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것이며, 따라서 이들도 결국 인간의 인식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규범과 윤리적인 지침에 대해서는, 인간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과 가치관에 따라서 크게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편적인 규범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가능합니다. 이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와 존엄성을 보호하고, 인간과 사회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보편적인 규범은 다양한 문화와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예를 들어 인권과 사회적 정의에 대한 규범이 이에 해당됩니다.
마지막으로,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주관적인 시각과 경험에 기반하여 세상을 인식하며, 이로 인해 다양한 인식차이와 인간간 갈등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각과 관점을 존중하며, 다양한 시각을 수용하고 통합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욱 넓고 풍부한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인식하며, 진리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이 있게 발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
재창작의 중요성
그 내용의 핵심은 다른 누군가 먼저 만들었던걸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내용의 글을 다시 쓰는 것이 무의미하지는 않다.
음악을 예로 들어보자, 원곡이 있다고 해서, 커버곡을 만드는 일이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에는 재창작자의 새로운 해석과 보충이 섞여있기 때문이다.
글의 핵심을 이해하는 여러가지 예시(혹은 배경지식)는 사람마다 다르기 쉽다. 그러한 시각은 결국 기존의 비슷한 핵심으로 연결되지만, 그럼에도 다양한 예시는 분명 핵심 이해와 발전에 큰 힘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떠한 사물을 한 가지 각도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양한 각도로 보아야 그 사물이 뭔지(, 그리고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일지2021.6.2.) 우리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하고 싶다.
--
수단 가치 분석 및 평가 (인간의 근본 목적을 규명한 글)
https://unfurl.tistory.com/100
unfurl.tistory.com (필자의 블로그)
Intercultural Ethics and “Critical” Universalism (@영어논문이라 확인이 필요)
https://www.mcst.go.kr/usr/minister/active/speechView.jsp?pSeq=651 (@확인이 필요)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61868.html [“국가가 정한 말 아니면 틀렸다니” 표준어 없애는 거 어때요_ _ 사회일반 _ 사회 _ 뉴스 _ 한겨레]
[기타 설명]@
이 글은 내가 고2~고3때 쓴 ‘칸트주의 비판’이라는 바보같은 글에서 파생된 주제 중 하나이다.
글 제작에 걸린 시간: 고3 후반기~대학교 ?학년
무의미한 인간관계를 모두 정리했다.
함께했던 시간이, 결코 짧지 않았는데.
그동안의 추억이 모두 부정 당하는 거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또 역시, 나는 배신 당했구나.
또 역시, 나는 버려졌구나.
또 역시, 나는...
온몸에 힘이 쑥 빠져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자괴감에 눈물 한 방울조차 흘러내리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어머니 생각을 했다.
2023년 6월 10일
내가 관리하는 마인크래프트 서버에서 대화한 내용.
#대화 상대의 허락을 구하고 업로드합니다.
M = 문건서(나)
[21:08:59] M : 나는 좀 싫어하는 애들이 많은데. ㅋ
[21:09:13] M : 쓸데없이 말이 많아서 그럼
[21:09:19] M : 괜히 적을 만들어서
[21:09:23] M : 약점을 드러내서
[21:09:32] A : 말 많이 하는건
[21:09:39] A : 그만큼 약점을 많이 드러내는거임
[21:09:41] M : ㅇㅇ
[21:09:48] M : 장단점이있는거같아요
[21:10:02] A : 장점도 있지만
[21:10:03] M : 그걸로 인해서,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고
[21:10:09] A : 단점이 더 많다고 생각함
[21:10:22] M : 확실히 권위는 좀 떨어지는 거 같음
[21:10:37] M : C랑 나랑 느낌이 다르잖슴 서버에서
[21:10:46] A : 사람들은
[21:10:47] M : C는 딱 딱, 할말만 하고 가잖슴
[21:10:54] A : 유머스러운 사람을 좋아함
[21:11:13] A : C씨는 딱딱 할말만 해도 사람들이 재밌어하는데
[21:11:22] A : M씨는 뭔가 다름
[21:11:45] M : 재미없다는 얘기죠?
[21:11:48] A : 넹
[21:11:48] M : 직설적으로 해도 됨
[21:12:10] A : 사람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하지
[21:12:21] M : 진지한 건 안 듣지
[21:12:22] A : 막 벽돌책 그런건 재미 없어하잖아요
[21:12:31] A : M씨가 딱 벽돌책같은 사람임
[21:12:46] A : 근데 내용은 평범한 벽돌책들이랑은 다름
[21:13:11] A : 그럼 사람들은 재미도 없어하고 이해도 못하는 거임
[21:13:32] A : 아직 다름을 인정하는 시대라기보단
[21:13:34] M : 그거 참 가슴이 아리네
[21:13:41] A : 다른걸 틀리다고 생각하는 시대니까
[21:14:05] A : 이게 나도 그런 때가 있었는데
[21:14:08] A : M씨같이
[21:14:21] A : 내가 싫어도 맞춰야 하는거임
[21:14:30] A : 내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게
[21:14:35] A : 내 약점을 숨기는거임
[21:14:53] A : 나도 반에서만 해도
[21:15:02] A : 나랑 안 맞는 러지같은 년들이 있어도
[21:15:07] A : 웃으면서 같이 노는데
[21:15:21] A : 그냥 인생은 사교계임
[21:15:34] A : 그중 가면을 벗어도 되는 자리가 있고
[21:15:41] A : 가면을 써야하는 자리가 있는거임
[21:16:12] M : 여기는 내가
[21:16:28] M : 상급자? 취급을 받으니까
[21:16:38] M : 좀 제멋대로 하는부분도 있음
[21:16:47] A : 다들 어리니까
[21:16:53] M : 근데 뒤에서 욕먹지
[21:16:56] M : ㅋㅋ;
[21:16:59] A : 그건
[21:17:02] A : 자연스러운거임
[21:17:14] A : 뒷담은
[21:17:26] A : 사회가 돌아가는데 필수적 요소라 생각함
[21:17:43] M : 무섭지
[21:17:51] M : 나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21:18:00] M : 담임선생님이
[21:18:07] M : 나에 대한 얘기를 중학교 선생님한테 들었대
[21:18:23] M : 전혀 예상치 못한곳에서 정보가 나돌음
[21:18:35] M : 나에 대해 좋게 말해주셨으니 망정이지
[21:18:41] M : 약간 당황스럽긴했음
[21:19:05] M : 뜬금없이 이 얘기를 내가 왜 꺼낸거지
[21:19:08] M : 무튼
[21:19:25] M : 에휴. 힘들다 나도
[21:19:35] M : 하물며 마크서버에서도 재미없다 소리듣는데
[21:19:41] M : 밖에서는 잘하겠음?
[21:19:45] A : ㄴ
[21:19:55] M : 나보고 재밌다는 사람도 있긴한데 그건 내가 센스있어서 웃긴게아니라
[21:20:01] M : 사람자체가 광대인거
[21:20:05] M : 동물원 동물보듯이
[21:20:15] A : ㅇㅇ
[21:20:22] A : 그럴가능성이 높음
[21:20:38] M :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할것이냐?
[21:20:43] M : 바꾸지 못함
[21:20:45] A : 변해야죠
[21:20:48] M : 물고기는 하늘을 날 수 없음
[21:20:54] M : 그래도 수영은 잘 함
[21:21:00] M : 수영에 집중해서 수영선수가 되면 됨
[21:21:15] A : 그말 좋죠
[21:21:18] A : 근데
[21:21:20] A : 그거는
[21:21:30] A : 최고가 되야함
[21:21:36] M : ㅇㅇ
[21:21:45] M : 최고가 되려고요.
[21:21:46] A : M씨는 뭘 하고 싶음
[21:22:15] M : 글쎄... 설명할 수 있긴 한데
[21:22:21] M : 여기서는 말하기가 좀 그렇네
[21:22:29] M : 보편적이지는 않음
[21:22:44] M : 뭐 가령 선생님이 되고 싶다든가, 경찰이 되고 싶다든가 이런 거는 아님
[21:22:51] A : 글을쓴다
[21:22:54] A : 노래를 만든다
[21:23:00] A : 그런 쪽 아녔나요
[21:23:21] M : 그건 수단이지
[21:23:24] M : 목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움
[21:23:41] M : 아 물론 그 자체로도 즐겁긴한데
[21:23:52] M : 궁극적인 바람이 그게 되지는 못 함
[21:24:01] A : 궁극적인 바람 그게
[21:24:05] A : 대충 뭔지는알것 같음
[21:24:21] A : 전에 인스타에 올린 그거 아님?
[21:24:28] M : 맘대로생각하셈 근데 굳이 내가 자세히 설명하기는 싫다
[21:24:34] M : 조금씩 바뀔수도있는거고
[21:24:56] B : M님 아뇽하세요
[21:24:57] A : 그럼
[21:25:05] A : 그 수단에서
[21:25:06] M : 아룡하세요~~
[21:25:16] A :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21:25:35] M : 포기하지 않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함
[21:25:47] M : 스스로 강한 믿음이 있음
[21:26:40] M : 다만 그 과정이 조금은 외로울 뿐이지
[21:26:55] M : 조금이 아니다. 많이.
[21:27:15] A : 외롭지 않으려면 순응하는게 해결법임
[21:27:21] A : 근데 그게 싫다면 견뎌야함
[21:27:29] M : 순응하는 성격은 아님
[21:27:34] M : 오히려 그걸 다 뒤집으려는 사람이지
[21:27:37] B : 음
[21:27:43] M : 다--- 뒤집는다고 모조리
[21:27:55] B : ㄷㄷ
[21:27:58] A : 그럼 독재자가 되야함
[21:28:06] A : 자신의 사상에 맞게 다 뒤집는건
[21:28:08] A : 독재임
[21:28:26] M : 독재가 될 수도 있고 ,, 선구자가 될 수도 있고,,,
[21:28:31] M : 아무도 모르는거지
[21:28:39] M : 현실적으로 다 뒤집지는 못하고
[21:28:53] M : 사람들한테 이런 면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거지
[21:28:57] A : 전에
[21:28:59] M : 내가 좀 쎄게 표현했네.
[21:29:01] A : M씨 인스타에
[21:29:06] A : 글을 봤거든요
[21:29:13] A : C씨가 댓글단 게시물
[21:29:17] M : 모르겠다. 인스타에는 막 헛소리를 싸질러놔서
[21:29:23] M : 구체적으로 뭐라했는지기억이안남
[21:29:33] A : 만약 그게 정말 M씨이 본심이라면
[21:29:42] A : 그걸 위해서 사람들의 인격을 거세해야함
[21:30:27] B : 너무 어린 B는못알아듣겠소요
[21:30:40] M : 내가 가진 목표에 대해 부정적으로 얘기하는거지 지금?
[21:30:45] M : 걍 묻는거
[21:30:56] A : 부정적이라기보단
[21:31:00] A : 이해를 못하는거지
[21:31:02] M : ㅇㅎ
[21:31:10] M : 우리 아버지도 나한테 그렇게 말씀을 하심
[21:31:29] M : 머 --- 그래도
[21:31:31] M : 인생사
[21:31:35] M : 다 내 맘대로 흘러갑니까?
[21:31:39] B : ㄹㅇ
[21:31:42] M : 이 길로 가다가, 저 길로 가고
[21:31:43] A : 모르는게 인생이긴함
[21:31:48] M : 또 다시 돌아가고
[21:31:57] M : 내가 지금은 이러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21:32:06] M : 또 언젠가는 방향을 조금 틀 수도 있는거임
[21:32:14] B : 음
[21:32:17] A : 지금 하는 대화가
[21:32:26] M : 그러니까 계속 노력하다보면
[21:32:27] A : 방향성을 좌우할 수도 있는거고
[21:32:34] M : 어디론가는 가게 될 거임
[21:32:57] A : 인생이라는 주제를 관통하는 말임
[21:33:13] M : 근데 내가 단 하나
[21:33:18] M :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21:33:22] M : 나는 사람을 사랑하고
[21:33:29] M :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21:33:34] M : 움직인다는 거임
[21:33:47] B : 지금도 충분히 그러시고 계신걸보면
[21:33:49] A : 저랑은 방향성이 다르네
[21:34:01] M : 내가 전혀 방향을 바꾸더라도
[21:34:08] M : 그건 물리적인 변화지
[21:34:19] M : 근본적인 건 변하지 않음
[21:34:43] A : 나도 이거 하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음
[21:34:51] A : 그냥 이거는 내 신념인데
[21:35:00] A : 나보다 중요한건 세상에 없다
[21:35:13] A : 이게 내가 평생 간직할 말임
[21:35:18] B : 맞지
[21:35:23] M : 나 예전에 그렇게 글을 썼었는데
[21:35:30] M : 나는 약간 생각이 바뀌었음
[21:35:47] M : 근데 머, 님이 잘못됐다는건아님
[21:35:53] M :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는거지
[21:35:55] A : 난 솔직히
[21:36:07] A : 이게 옳다 생각하면서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함
[21:36:45] A : 누가 죽어서 내가 슬퍼한다면
[21:36:58] A : 그건 그 사람에 대한 온전한 슬픔이 아니라
[21:37:07] A : 슬퍼하는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거임
[21:37:56] A : 아우 이제 그만해야겠다
[21:38:05] A : 말이 많아지면 이래서 안좋아
[21:38:12] B : A님 좀 쩌네요
[21:38:14] M : 나도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지
[21:38:21] M : 너도 그걸 아는 사람인 거 같다
[21:38:35] A : 그쵸
[21:38:38] M : 근데
[21:38:39] M : 그러니까
[21:38:42] M : 그런 너가 좋은거임
[21:38:49] M : 너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21:38:54] M : 너가 좋은거임
[21:39:13] M : 말장난같다 . ㅋㅋ
[21:39:17] M : 쨋든 나 운동하러 감
[21:39:17] A : ㄹㅇ
[21:39:20] B : ㅃㅃ
[21:39:33] A : 렛풀다운 재밌음
[21:39:45] M : 철학이 참 재밌는학문이지
[21:39:45] A : 그거하면 등빨 좋아짐
[21:40:04] B : 철학 좋아하는사람들은 처음이네
[21:40:15] A : 난 아닌딩
[21:40:37] A : 암튼
[21:40:44] A : 난 네라나 캐야겠다~
[21:40:44] B : 인생...
[21:40:54] A : 인생은 네라고
[21:40:57] A : 드래곤 알이여
2023년 2월 25~26일, 처음 가 본 술자리.
친절한 선배들에, 색다르고 흥미로운 경험이었다만, 술게임에서 기가 빨렸다.
역시 여긴 내가 있을만한 곳이 아니었다.
나는 여기서도 평소처럼 음악을 듣고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고,
술자리에서 도망치듯 나와 준비해둔 아이패드와 블루투스 키보드로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가게 될 길이 더욱 명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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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에 입학하고 딱 하나 좋은 것은, 나에 대한 사람들의 선입견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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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사람들은 대부분 착한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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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에 입학하고서, 늘 외로웠다. 학교 갔다가.. 집 갔다가.. 학교 갔다가.. 집 갔다가.. 누군가와 유의미한 대화를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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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입학했다고, 취업에 성공했다고, 공부가 끝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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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나에게 뭔가를 떠먹여주지 않는다.
결국은 각자도생. 내가 알아서 살 길을 궁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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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니는 대학 이상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를 나온 문건서‘가 아니라
’문건서가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를 나왔구나’가 되어야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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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대학에서 철학을 배워보니, 죄다 뜬구름 잡는 얘기 같고, 과제도 재미없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당장 회의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결국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대화하는 것이 공부인데.
굳이 비싼 등록금을 내 가며 학교를 다녀야만 이것들을 할 수 있는걸까...?
[2023 07 01 당장 인터넷만 둘러보아도, 도서관만 둘러보아도, 엄청나게 많은 양질의 정보가 있다. 굳이 대학을 졸업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전문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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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의 오랜 꿈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선동가가 되는 것이다.
지금처럼 종일 방구석에 틀어박혀, 재미없는 글만 쓰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아...
후회되서 미치겠다.
진짜 예뻤는데,
많이 좋아했는데,
그땐 말 한마디 거는 게 어찌 그리 두려웠는지.
수년이 지나고도 잊혀지질 않는다.
몇 번을 꿈에 나왔는지 모른다.
몇 번을 울었는지 모른다.
그 이름을, 몇 번을 되뇌었는지 모른다.
행방이 묘연하다.
유일한 정보는 : 그 사람의 이름과, 얼굴과, 직업 뿐.
분명히, 지금도, 어딘가에는 살아 숨쉬고 있을 텐데.
......
내가 미친놈이지.
어쩌면, 모든 게 허상이었을지도.
요 며칠 과제와 망상에 시달리며,
밤잠을 3시간씩밖에 못 자서 그런지...
몸살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자꾸만 기침이 나고,
머리가 아프고,
뼈마디가 쑤시다.
밥이 목에 넘어가질 않는다.
그래서 나는 숙제는 커녕
토토 산책도 못해주고.................
종일 잠만 잤다.
제 몸 간수도 못하면서 무엇하리?
지난 세월,
감히 글에 담아낼 수 없을만큼,
많은 일이 있었지.
언제쯤,
어떻게,
이 빚을 다 갚을 수 있을지 막막하다.
--
주제넘게 뛰어오르다가,
천장에 머리를 박아 고꾸라지다.
너무 슬퍼.
넘 슬퍼서, 슬프고, 슬퍼요.
단지, 슬퍼요 나는...
하염없이 넋두리만 늘어놓는 밤이다.
[2023 05 28
더이상 몸을 혹사시켜서는 안 되겠다.
건강해야 오랫동안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또 밤새 감정에 심취해가지고,,
내리 몇 시간 동안 글을 만졌다.
막연한 단상들과,
애절한 사랑 이야기.
메모장에 쌓인 똥이 많다.
우선 책을 많이 읽어야 할 텐데 말이지.
아무튼 오늘도 나는
개같이 분노하고, 개같이 슬퍼했다.
그나마 남은 기운은 모두 남을 헐뜯는데 썼다.
할 게 정말 많은데,,,
어쩌다가 벌써 세 시 반이 됐는지.
아까 오후에 운동을 많이 해서 피곤하다.
그러니 이만 잠을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