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명이 오천 원을 받고 한 명이 만 원을 받는 것과 반대로,
열 명 모두 삼천 원을 받는 것이 합리적인 것일까? (물론 극단적인 전자 성향의 상황에는 아홉 명이 백원을 받고 한 명이 십만 원을 벌게 되는 끔찍한 상황도 존재할 수 있다 들었다.)
심리적인 가치를 배제한다면 전자가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생각은 필연적으로 심리적인 가치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생각이 복잡해지니, 돈과 심리적인 만족감이 주는 만족(쾌락)의 정도를 마음 속으로 대충이나마 분석해보아야겠다. (다양한 경로의 만족들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는 함부로 정의내리지 못 할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돈과 감정적인 만족은 모두 쾌락으로 환원될 수 있다. 따라서 어떠한 경로의 만족이 더 신성하다 여겨져선 안 되는 것이고, 때에 따라선 한 가지 경로를 포기하되 다른 경로에서의 큰 쾌락을 얻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다, 나는 조금 배가 아프더라도, 이의를 제기하면 모두 다 돈을 놓아야 하는 상황에서 내가 50000원을 받고, 나머지 다른 한 명이 60000원을 받는 것쯤이야, 만족할 것 같다.
[이성적 낙관주의자였나, 가뭄에 콩 나듯(..) 비교적(....) 최근에 읽었던 책 속에서 이러한 내용이 있었던 것 같다. 인간의 거래를 부각시키던 부분이었는데 한 번 들어보아라; A가 천 만원을 B와 나누어야지만 A가 나머지 돈을 가질 수 있다는 조건을 가진 채 A가 천 만원을 받는다. 나눌 가격의 비율은 A가 결정하며, B가 그러한 비율을 만약 거절한다면 A와 B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여기서 사람들이 거래의 결과가 주는 개인의 이익과는 무관(엄밀히 따지면 무관하지 않다)하게 (사람에 따라서 다르지만)어느 정도의 불공정한 비율을 거절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분명 개인의 이익에는 불합리하겠지만, 이러한 풍조는 공익으로 이어지기에, 혹시 유전자에 각인된 것이 아닐까 조심스래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