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 때부터 보아온 길고양이가 한 마리 있다. 밥을 자주 주어 건강하게 성체가 된 딸 아이인데, 어느 날 새끼를 밴 듯 하더니 젖먹이 한 마리를 내 앞에 데려오더라. 오래 보던 고양이의 새끼라서 그런지 더 정이 갔다.
아마도 추운 날 유일하게 살아남은 새끼일 것이다. 건강은 양호해보였지만, 어미가 조금만 멀리 떨어졌다 싶으면 끊임없이 칭얼거리며 어미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연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높은 곳을 도약하며 이동하는 어미를 자식이 따라다니는 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아기는 아장아장 걸을 수 있었지만, 높이 뛰지는 못 했다. 능력도 안 되는 자식에게 방법을 알려주려는건지, 어린 어미는 몽애하게도 높은 곳을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새끼를 놓고서는 마음대로 이동하질 못 하니 답답한 듯 하였다. 모든 게 귀여울 뿐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사랑스럽지만, 누군가에겐 성가시고 시끄러운 짐승에 불과한 것이 고양이다. 아랫집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새끼를 몇 미터쯤 되는 밑으로 던졌다. 어미 앞에서 이러는 건 좀 아니지 않느냐고 물으니, 고양이들은 새끼 치는 속도가 빨라 수를 줄여야 한다고 하더라. 마침 새끼가 생긴 원인은 무책임하게 고양이 밥만 주던 나에게 있었다. 따라서 나로서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새끼는 발버둥쳤었지만, 어미와 나는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을 멀뚱멀뚱 지켜볼 뿐이었다. 아마도 새끼는 죽었을 것이다. 떨어져서 죽지 않았더라도, 젖을 먹지 못하면 결국 혼자 죽을 것이다. 고양이를 던지는 사람이 새끼를 정성껏 돌봐줄 이유는 없다.
그의 살생은 그의 입장에선 합리적인 것이었겠지만, 나는 그의 살생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염없이 매몰찬 세상을 바라보며 납득해야만 하는 상황이 나를 괴롭힌다. 글을 쓰는 지금도 고양이 소리가 귀에 맴돈다. 어미가 아이를 부르는 소리일지, 혹은 아이가 살아남아 어미를 찾는 소리일지, 그것도 아니라면 내 환청인 것인지 알 수 없다.
다시금 드는 생각이, 정말 세상은 나 혼자 뿐이라는 것이다. 내 입장과 항상 일치하는 이상적인 세상은 존재할 수 없다. 뭐, 사실 새끼를 잃은 고양이가 자식을 잃은 사람처럼 비통해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 또한 그들만의 세상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