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강아지도 강아지가 맞다
다마고치 등 디지털상의 애완동물은 생명이 아니니까, 키우던 그것이 죽어서 누군가 운다면 당신은 그에게 그것은 허상일 뿐이라며 한숨을 내쉴지도 모르겠지만, 본질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결코 허상 따위로 취급될 수 없다. 인간적인 관점을 포기하면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허상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의 의미는 오로지 개인의 관점에서만 규정되는 것; 예시로 생명이 고귀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내가 그동안 살아오며 본 적이 없으므로, 그들과 마찬가지로 생명 자체에 성스러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경우를 고려해본다면, 예를 들어 모기와 고양이는 근본적으로 대등한 생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반면, 누군가 고양이를 괴롭히면 쓰레기로 취급한다. 인위적인 의미에 집착하며 괴상한 이성을 고집하는 사람은 극소수; 어릴 때부터 배운 규범이 어떻든 결국 우리는 자연스래 스스로가 느끼는대로 행동하게된다. 실상은 돌과 다를 바 없는 생명, 이 또한 인간만의 입장에서만 가치 있게 인식되는 의미였다. 이렇게 인간으로 태어난 세상에 인간이 느끼는 것 이외의 가치가 도대체 어디에 있다고 그러시는지, 욕구와 조화되지 않는 울타리에 사로잡혀 억지로 자신을 포기할 필요가 있을까? (적어도 울타리는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생명이 아닌 애완동물이 애완동물로 여겨질 수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이라는 것이다. 현실이 어떻든 의미는 인간이 부여하는 것인데, 애완동물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졌든지간에 그것이 인간의 애정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애완동물로 역할할 수 있다. (동물이 아니라는 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능하다)
[물론 당신이 당신의 애완동물이 생명으로서의 희로애락을 실제로 느끼는지에 대해 큰 의미를 두는 사람이라면 내 말이 틀린 것이 된다. 당신은 까다로운 사람. 그렇다면 당신은 야동도 안 보고 피임도 안 하시나요? 물론 자연스러운 게 인간적인 관점에 가장 부합하긴 할겁니다. 그러나 가짜는 여러가지 불편함들을 보완해주므로 훨씬 현실적일텐데요. 나도 재산이 넘쳐났다면 진짜들로만 삶을 즐기며 살았을겁니다.] [물론 당신이 디지털 강아지를 애완동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해서 다른 사람의 관점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해선 안 된답니다. 사람마다 느끼는 건 조금씩 다르니까요.]
[덧붙여서 마찬가지로 남이 수호해주는 인권 또한 인간의 공감에서 비롯되는 것일 뿐; 우주에서의 인간은 무가치해서 우리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할 이유는 없다. 그래서 인간의 공감에서 소외되는 권리는 스스로 투쟁하며 지켜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위한 방법은 상대방에게 연민 이외의 동기를 부여하는 것; 협박이라든지, 상생이라든지, 어쨌든 나한테 잘해줘야 할 이유를 만드는 일이다. 이렇게 현대의 인권이란 인간 간의 천성적인 사랑과 함께 사회 계약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인간을 존엄한 존재로 취급해야만한다는 강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입장에 따라서 결정되는 불안정한 인권이다.]
[이 세상에 과학처럼 진짜라고 불릴만한, 인간이 사라져도 영원할 의미는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의미는 인간만의 착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도 인간이 부여한 의미. 내 몸과 외부와의 경계를 정의하는 것도 인간이 부여한 의미. 행성이라는 것도 인간이 부여한 의미.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은 각각의 원자들일 뿐.]